중앙유럽 왕국사 -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들끓는 민족들의 땅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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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2,000년의 분열과 통합으로 읽는 『중앙유럽 왕국사』.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지도 위에서 늘 '사이'로만 정의되어온 중앙유럽. 마틴 래디는 이 땅을 주변이 아닌 세계사의 결정적 무대로 복권합니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황제 카를 5세』 등으로 잘 알려진 중앙유럽 분야 최고 전문가인 그의 평생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입니다.


로마 제국의 변경에서 시작된 2천 년의 드라마를 민족, 권력, 사상의 교차로로서 풀어냅니다. 중앙유럽을 지리적 실체가 아닌 개념적 공간으로 다룹니다. 제국과 제국 사이의 완충지대이자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신앙과 이단, 예술과 학살이 교차한 역사의 축소판. 마틴 래디는 이곳을 유럽의 거울이라 부릅니다.


중앙유럽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침략'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앙유럽은 결코 수동적인 희생자에 머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훈족에서 헝가리인으로, 합스부르크에서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침입자이자 개척자였으며, 동시에 역사의 변화를 만들어낸 주체였습니다.


초기 중앙유럽의 역사는 침입의 연속이었습니다. 로마의 변경에서 훈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몽골-타타르족까지 수많은 세력이 이 땅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마틴 래디는 이를 파괴의 역사가 아니라 혼혈의 탄생사로 읽습니다. 훈족이 로마 제국을 무너트려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듯이, 훈족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헝가리인들은 중앙유럽의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습니다.


중앙유럽은 어느 한 제국의 식민지로 고정되지 않았고, 침입자들이 남긴 유산이 언어, 제도, 문화에 흡수되었습니다. 이런 다층적 정체성은 훗날 중앙유럽의 민주주의 실험과 문화적 다양성의 토대가 됩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권력이 왕으로 집중되던 13세기, 중앙유럽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중앙유럽 왕국사』는 중앙유럽 정치의 독특한 DNA를 들려줍니다. 귀족들의 총회, 농민들의 자치, 그리고 상인 동맹은 모두 아래로부터의 권력이었습니다. 의회와 소집회는 공동체의 윤리와 권리를 상징했습니다.


중세 중앙유럽은 공동체 정부와 공화주의적 실험의 본산이었다고 합니다. 서유럽보다 먼저 민주주의의 싹을 틔운 셈입니다. 상업의 영역에서도 자치 정신이 이어졌습니다. 한자 동맹은 200여 개 도시를 연결한 초국가적 네트워크로 오늘날 EU의 원형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룩셈부르크와 합스부르크 왕가가 등장하며 이 수평적 권력은 다시 위로부터의 통치로 전환됩니다. 중앙집권적 통치의 마리아 테레지아 개혁은 근대 국가의 탄생을 알립니다. 문제는 그 질서가 곧 관료제와 군사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교육받은 국민을 길러낸다는 명분 아래 국가는 개인의 자율성을 흡수해버렸습니다.


중앙유럽은 단지 정치적 변동의 현장이 아니라 사상의 실험실이기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루터의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들이 모여 거대한 사상의 전환을 이루는 거라는 걸 보여줍니다.


중앙유럽의 학자들은 민족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정체성의 언어학을 발달시켰습니다. 공동의 언어와 문화가 민족의 기본 요소라는 신념은 오늘날 민족주의의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자긍심의 원천이자 배제의 도구로 말입니다.


판화와 인쇄기의 발명 역시 이 지역의 혁신이었습니다. 중앙유럽 예술의 양식과 장르가 국제적으로 보급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논문이 활판으로 복제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듯, 사상은 기술과 손을 잡으며 세계화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근대 중앙유럽의 중심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848년 혁명은 통제 체제에 균열을 냅니다. 역설적으로 민족주의는 다시 억압의 기제가 되었습니다. 헝가리의 마자르 민족이 주도한 혁명은 다른 민족을 배제함으로써 순수한 국민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내며 민족의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이 시기 중앙유럽의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은 낭만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흔들렸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그림 형제의 민담, 카프카의 문장은 모두 그 긴장 위에서 태어났다.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동일성 사이의 줄다리기. 결국 이 갈등은 20세기의 파국으로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앙유럽은 절단된 유럽입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등장한 신생국들은 여러 민족이 뒤섞인 불안정한 조합이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국경을 그었지만 경계는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는 이 지역을 인종학살의 무대로 바꾸었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중앙유럽인들만큼 평범했던 공무원, 노동자, 과학자들은 '악의 평범성'을 상기시킵니다. 철도 시간표를 맞추고, 화학 실험을 하던 일상 속에서 학살의 기술이 완성되었습니다.





마틴 래디는 절망의 역사 속에서도 자기 갱신의 힘을 봅니다. 소련 붕괴 이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중앙유럽 국가들은 부패와 언론 통제 같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합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라이바흐가 상징하듯 이 땅의 지성은 언제나 체제의 모순을 비웃으며 살아남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유럽의 정치적, 군사적 중요성은 재확인되고 있습니다. 2,0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앙유럽 왕국사』는 현재의 중앙유럽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입니다.


적재적소에 삽입된 지도 덕분에 중앙유럽의 끊임없이 변하는 정치적 경계를 한눈에 파악하게 해줍니다. 『중앙유럽 왕국사』는 권력과 공동체, 기억과 망각의 관계를 탐구하는 정치철학서이자, 유럽 문명사의 미시적 복제판입니다. 한반도 또한 대륙과 해양 사이, 사이의 지정학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묘한 데자뷔를 남깁니다.


마틴 래디는 역사를 승자의 서사가 아니라, 공존을 향한 실패와 재시도의 기록으로 읽어냅니다. 중앙유럽의 흙먼지 속에는 결국 인간의 집념, 사유, 그리고 반복된 재건의 의지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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