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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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견디는 힘이 되는지를 증명하는 수잰 스캔런의 『의미들 (원제 Committed: On Meaning and Madwomen)』. 회고록, 정신의학 비판서, 문학비평 세 가지 장르가 콜라주처럼 겹쳐지면서 예상 불가능한 깊이를 담은 책입니다.


수잰 스캔런 저자는 자살 시도 이후 3년간 정신병동에 입원했던 경험을 되짚으며, 의료 체계가 만들어내는 정상과 비정상의 폭력적 경계를 해체합니다. 그리고 실비아 플라스, 버지니아 울프,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선배 여성 작가들의 글을 통해 자신이 겪은 상실과 광기를 새로운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갑니다.


"나는 책이란 의사소통에 관한 것임을 몰랐다. 한 권의 책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누군가에게 말하는 한 방식이다." p184


저자에게 있어 문학은 병을 고치는 도구가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장소였습니다. 문학은 그녀에게 치료가 아니라 관계였고, 관계는 곧 의미의 시작이었습니다.





1부에서는 정신병동 입원 이전의 자신을 추적합니다. 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적 엄격함 속에서 성장 후, 뉴욕으로의 이주 그리고 스무 살에 맞닥뜨린 심연까지.


저자는 "전자레인지에 구운 감자 외의 다른 음식들은 절대 삼킬 수 없고 아무와도 얘기하지 않고 여러 날, 여러 주를 보내는 게 일상"이 된 자신을 기술하면서 정신적 붕괴 직전의 모습을 노출합니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로 절망을 표현합니다. 먹을 수 없는 상태, 말할 수 없는 침묵, 시간이 멈춘 듯한 경험들. 우울증 혹은 불안장애라는 진단명에 앞서 절망의 체성(體性)을 마주하게 하는 문장들이 펼쳐집니다.


1부를 관통하는 핵심은 형성의 과정입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부서뜨릴 정도의 고통으로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되, 그것이 외부 사건이나 명확한 트라우마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무형의 슬픔, 언어화되지 않은 상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중첩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내가 병원에 있던 시기는 '되찾은 기억'에 대한 믿음이 정점에 달한 때였다. 1990년대 초에는 점점 더 많은 환자가 아동기에 성적 학대를 당했던 기억을 되찾았다.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이런 기억을 찾아내도록 부추겼다."라며 정신의학이 어떻게 환자들을 기억 '만들기'에 동참시키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정신의료 현장의 윤리적 복잡성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의미들』의 매력은 '미친 여자들'이라 불렸던 여성 작가들의 글을 하나의 문학적 혈통으로 재구성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비아 플라스의 자기파괴, 샬럿 퍼킨스 길먼의 저항, 오드리 로드의 분노,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슬픔... 모두 자기 서사를 되찾기 위한 자매들의 기록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들로부터 광기의 서사를 빌려와 그 안에 잠든 목소리를 되살립니다. '미친 여자'는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의 균열을 감지하고 언어로 기록한 선구자들입니다. 저자에게 광기는 치료되어야 할 병이 아니라, 나를 당혹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에 관한 진실로 향하는 통로입니다.





2부에서는 저자가 실제로 입원했던 뉴욕주립정신의학연구소의 5층 병동에서의 3년을 기술합니다. 정신의료 체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직면합니다. 병원은 분명히 치료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환자들이 정신과 환자 되기에 점점 더 능숙해지도록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다는 겁니다. 약물 처방, 상담 시간, 진단명의 반복적 확인. 이 모든 절차들이 환자의 정체성을 오히려 환자성(patienthood)으로 견고히 하는 기제로 작동했습니다.


의사의 진단 틀이 환자의 실제 경험을 포착하지 못할 때, 그것은 단순한 오진이 아니라 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저자가 겪었던 외로움과 슬픔은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화학적 불균형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였던 겁니다.


병동에 함께 있던 다른 환자들의 초상화도 펼쳐집니다. 정신병동이 동질적인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적 고통과 저항이 충돌하는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정신의학이 진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일반화의 폭력성에 대한 암묵적 항의로 저자가 선택한 글쓰기 방식이 매력적입니다.


후반부에서 저자는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을 빌려 '사별의 슬픔'을 정신질환으로 환원하는 사회적 폭력을 비판합니다. "크리스테바에게 사별의 슬픔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위대한 미술과 위대한 문학의 주제였다."라고 합니다. 슬픔의 지속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진정한 회복의 시작이라고 말이죠.


정신의학적 진단은 슬픔을 병명으로 가두지만, 문학은 그 슬픔을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인간은 슬픔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슬픔을 언어화함으로써 살아간다는 것, 저자의 글은 바로 그 생의 기술을 증명합니다. 그에게 문학은 감정의 분석이 아니라 감정의 거주입니다.


'읽기'라는 행위를 심리적 회복의 중심에 두는 『의미들』. "읽기의 경험이 나를 다시 삶으로 데려왔다'라고 고백합니다. 읽기는 수동적 감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치유 행위입니다.





이 책은 한 여성이 자신을 병이 아닌 이야기하는 존재로 되돌려놓는 기록입니다. 저자에게 회복이란, 일상의 조각을 조금씩 되살리는 일, 다시 쓰기와 다시 읽기를 반복하는 일입니다. 문학은 삶을 견디게 하는 보루이며, 세계를 다시 믿게 하는 근거가 되어줍니다.


진단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지 않지만 동시에 진단이 유일한 해석 틀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문학을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문학이 어떻게 우리의 내적 경험을 언어화하고 사회화하는 방식을 제공하는지, 그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진단명이 아니라 의미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당신의 고통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텍스트라고 말하는 『의미들』.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자신의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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