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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전쟁 - 우리는 왜 이 전쟁에서 실패를 거듭하는가
요한 하리 지음, 이선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100년 전 미국이 시작한 마약과의 전쟁, 승리했을까요? 안타깝게도 답은 '아니오'입니다. 오히려 이 전쟁은 폭력을 키우고 중독자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넣었다고 합니다.
『도둑맞은 집중력』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는 사실 그 이전에 훨씬 더 도발적인 주제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의 첫 책 『마약 전쟁(Chasing the Scream)』은 마약 정책의 근본적 패러다임을 뒤흔든 일종의 폭탄선언과도 같았습니다.
한국어판에는 특별히 우리 사회 상황을 겨냥한 서문이 실려 있습니다. 한국판 마약 전쟁의 위험성과 한계를 성찰하게 하는 거울처럼 읽힙니다.

요한 하리는 3년간 30여 개국을 돌며 마약 전쟁의 최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중독으로 인생이 망가진 이들부터 멕시코 카르텔의 킬러, 포르투갈의 혁신적 정책입안자까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마약과 중독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마약 전쟁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1914년 해리슨마약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놀랍게도 그 이전까지는 헤로인과 코카인이 일반 약국에서 자유롭게 판매되던 의약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약이 악의 화신이 되었을까요?
답은 초대 연방마약국장 해리 앤슬링어에게 있습니다. 금주법 실패로 의기소침해진 부하 직원들을 거느린 그는 마약국의 존재 이유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충격적입니다. 바로 인종차별을 무기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전문가들 대다수는 대마초 금지는 옳은 방법이 아니며 언론이 대마초와 관련해 잘못 전하고 있다고 판단했지만, 해리 앤슬링거는 그 말을 무시합니다. 대마초는 엄청 위험하므로 근절되어야 한다고 믿는 한 전문가의 말만 인용한 겁니다.
해리 앤슬링거는 흑인들이 대마초를 피우면 백인 여성에 대한 욕망이 치솟는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퍼뜨렸습니다.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가 흑인 린치를 고발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표적 수사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같은 헤로인 중독자였지만 백인이었던 주디 갈랜드는 치료 기회를 제공받았습니다. 마약 전쟁은 처음부터 공정한 정의가 아닌 인종차별의 도구였던 셈입니다.
더불어 권위주의, 위선, 국제 권력의 압력 속에서 마약 전쟁이 확산되고 정당화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한 역사적 사례로서 박정희 정권과 윤석열 정권이 소환되기도 합니다.
마약 단속의 역설적 효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약상을 많이 잡을수록 마약 범죄가 줄어들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던 겁니다. 뉴욕 경찰관의 경험담이 잘 보여줍니다. 2주 만에 악명 높은 마약 밀매업자 100명 중 80명을 검거하는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새로운 거래자들이 공백을 메우며 마약 거래는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습니다. 더 심각한 건 핵심 인물이 체포되면서 권력 공백을 두고 벌어진 조직 간 전쟁이었습니다. 결국 마약 단속이 강화될수록 폭력 범죄가 급증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요한 하리가 만난 전 멕시코 카르텔 킬러 치노의 증언은 충격적입니다. 마약이 불법화되면서 가장 먼저 도덕적 제약을 버리는 사람이 경쟁우위를 차지하고, 마약시장을 더 많이 장악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마약 전쟁은 결국 가장 잔인한 자들에게 시장을 넘겨준 꼴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마약의 강력한 화학적 중독성 때문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고 믿어왔습니다. 하지만 요한 하리가 소개하는 브루스 알렉산더의 '쥐 공원' 실험은 통념을 뒤엎습니다. 좁은 우리에 갇힌 쥐는 마약이 든 물을 계속 마시다 죽었지만, 넓은 공간에서 동료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는 환경의 쥐들은 마약 물을 거의 마시지 않았습니다. 중독이 화학물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과 관계의 문제임을 시사합니다.

마약 사용자 중 10퍼센트만이 마약으로 인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마약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 90퍼센트 정도, 압도적인 다수는 마약으로 해를 입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통계는 다름 아닌 유엔 마약통제국에서 나온 수치입니다. 마약과의 전쟁을 지휘하는 기관에서조차 인정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일부만 중독에 빠질까요? 저자는 아동기 트라우마, 사회적 고립, 상실감 같은 인간적 조건이 핵심 요인이라고 짚어줍니다. 2001년 포르투갈은 모든 마약 사용을 비범죄화합니다. 다들 포르투갈이 마약 천국이 될 거라고 우려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마약 관련 사망자가 급감했고 마약 사용률도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마약 전쟁』에서 요한 하리가 주목하는 건 마약 전쟁의 진짜 피해자들입니다. 볼티모어 같은 마약 전쟁지역에서는 매일 밤 총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자라납니다. 한 번이라도 마약 범죄로 적발되면 취업 기회를 잃고, 학자금 대출도 받을 수 없으며, 심지어 투표권까지 박탈당합니다. 중독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 가장 취약한 계층만 더욱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중독의 반대말은 금단이 아니라 연결이라고 말하는 요한 하리. 사회와 가족, 공동체로부터 끊어진 개인을 다시 이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약 전쟁을 끝낼 유일한 길이라고 합니다. 100년간 이어진 실패의 역사를 해부하며,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라고 촉구하는 『마약 전쟁』. 중독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사회의 단절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