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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느린 작별
정추위 지음, 오하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치매에 걸린 남편과의 일상을 담은 『아주 느린 작별』. 출간 즉시 대만을 눈물바다로 만든 화제작입니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은 대만의 언어학자 정추위 교수는 68세의 나이에 40년 동반자를 잃어가는 과정을 기록합니다.
그저 감동적인 치매 간병 에세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합니다. 상실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재의 의미를 재구성해 나가는지 보여주는 철학서에 가깝습니다.
수학 교수였던 남편 푸보가 치매를 진단받은 순간, 부부의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저자가 정년 2년을 앞두고 맞닥뜨린 현실은 평생 연구해온 언어가 무력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주 느린 작별』에서 그는 연구자가 아니라 돌봄의 주체로서 서 있습니다.

매일 아침 커피와 함께 대화로 하루를 열던 두 사람의 루틴은 무너집니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오면 예전처럼 열렬히 반겨주는 눈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언어를 연구해온 사람이 언어의 소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아이러니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더 이상 "여보"라는 호칭조차 듣지 못합니다. 언어는 소통의 매개였지만 동시에 사랑의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68세의 나이에 24시간 간병인이 되어야 했던 돌봄의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화장실의 대참사, 밤마다 반복되는 불면. "심호흡하자, 심호흡. 절대로 흥분하면 안 돼. 그이는 환자잖아."라며 스스로를 달래는 문장은 돌봄이 지적 훈련이 아니라 감정의 전쟁임을 보여줍니다. 언어학자가 수십 년의 연구로 다룰 수 없었던 영역이 바로 이 '말 없는 소통'의 장이었던 겁니다.
하루를 버틴다는 말이 이런 의미가 될 줄 몰랐을 겁니다. 치매와의 동행에서 약을 먹이는 것도, 외출을 설득하는 것도 전투입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승자는 없습니다. 오직 버틴다는 사실만이 기록됩니다.
남편의 기억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너질 일만 남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간병 과정에서 자신의 삶이 소진되어 가는 것을 직면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이야말로 사랑의 또 다른 얼굴임을 깨닫습니다. 언어로 다 설명되지 않는 무언의 헌신 말입니다.
남편의 기억은 급격히 무너져 내립니다. 아내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 착각합니다. 이 짧은 인사는 결혼 생활 전체를 잊어버린 채 건네는 가장 잔인한 언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의 유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딸의 위로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엄마, 너무 슬퍼 마세요. … 우리는 지금처럼 계속 아빠를 사랑하고 있으면 돼요."라고 말이지요.
저자는 언어 대신 감각, 기억 대신 현재의 태도를 붙잡습니다. 결국 사랑은 반응이나 기억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유효한 감정임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사랑이 언어 이전의 행위이자 본능임을 증명합니다.
정추위 교수의 학문적 배경은 이 기록을 독특하게 만듭니다. 평생을 언어학 연구에 바쳤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은 언어의 상실이었습니다. 학문의 도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 언어가 사라진 뒤에도 남는 감정과 관계의 심연을 마주한 것입니다.
『아주 느린 작별』은 언어 이후의 세계를 탐구하는 학자의 보고이자, 인간 존재를 언어로만 정의할 수 없음을 드러내는 생생한 사례집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돌봄의 종착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회복입니다. 위급 시 자신을 돌봐줄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그간 외면해 온 치료를 받습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무게를 덜어내기로 결심합니다.
언젠가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을 마주해야 하는 모든 이에게 상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지 질문을 건넵니다. 치매로 인해 모든 기억을 잃은 배우자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그 사랑의 근거는 무엇인가? 언어와 기억의 종말 이후에도 남는 것이 무엇인지 깊은 여운을 안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