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명카피 필사 노트 - 恋が終わってしまうのなら、夏がいい。사랑이 끝나버릴 거라면, 여름이 좋다. 일본어 명카피
정규영 지음, 김수경 감수 / 길벗이지톡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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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일본어 명카피 핸드북』의 후속작인 『일본어 명카피 필사 노트』는 문장의 결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는 필사책입니다.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40년간의 일본 광고 중 완성도 높은 작품들만 골라내어 100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광고는 소비를 자극하는 도구로만 여겼지만 『일본어 명카피 필사 노트』를 펼치는 순간, 광고는 상업적 문구를 넘어 시대의 공기와 인간의 감정을 압축한 문학적 언어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정규영 저자는 30년 가까이 현장에서 광고를 써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광고가 가진 미묘한 언어적 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의 일본어 공부 시작점 역시 교재가 아닌, 광고 카피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고서점에서 수십 년 치 광고 연감을 모아 필사하며 언어와 감각을 동시에 체득했고, 그 결과물은 SNS에서 공유되며 큰 관심을 얻었습니다.


문장에 담긴 생각을 손끝으로 옮기면서 나만의 것을 채우는 필사를 통해 일본어 학습과 명상 리추얼의 힘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장은 삶의 풍요로움에 대한 명카피 모음입니다.





일본 스트리밍 서비스 U-Next의 2021년 광고 "人生に ムダな時間を (인생에, 쓸데없는 시간을)."은 오히려 쓸데없음이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무다(ムダ)’가 가진 이중적 뉘앙스를 포착합니다. 한자로 쓰였을 때는 사색적이고 무겁게 다가오지만, 가타카나로 표기되면 가볍고 유쾌한 톤으로 변주됩니다. 동일한 발음이 표기 방식에 따라 의미의 색조를 달리하는 것은 일본어 특유의 언어적 미학을 보여줍니다.


일본어로 명카피 헤드라인과 바디 카피를 소개하고, 우리말 번역으로 진입장벽을 낮춰 줍니다. 일본어 단어 풀이는 물론이고 언어를 옮기는 것을 넘어 문화를 번역해 그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까지 우리말로 전달합니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해도, 광고 카피 장르가 지닌 압축된 표현력과 정서적 파급력을 이해하는 것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장에서는 사랑과 계절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은 명카피가 등장합니다. 루미네(Lumine)의 2009년 광고 "恋が終わってしまうのなら 夏がいい (사랑이 끝나버릴 거라면, 여름이 좋다)."는 이 책의 부제로 사용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일본 광고가 가진 특유의 감각은 조건부의 서정성입니다. 사랑은 언젠가 끝나지만, 끝남에도 계절의 선택지가 있다는 발상이 신선합니다. 봄의 덧없음, 가을의 쓸쓸함, 겨울의 외로움 대신, 여름의 눈부심 속에서 맞는 이별은 덜 슬플 것 같다는 역설적인 위로를 담고 있습니다.


‘鬱陶しい(うっとうしい)’ 단어의 의미도 재밌습니다. 원래는 꿉꿉하거나 귀찮다는 의미이지만, 광고에서는 성가실 정도로 눈부신 햇살이라는 이미지로 변용됩니다.


광고 카피는 일상의 언어를 낯설게 전환해 감정의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냅니다. 필사를 통해 일본어를 익히는 것을 넘어, 언어가 감정을 빚어내는 방식 자체를 체험하게 됩니다.





마지막 장은 자기 발견과 삶의 동력을 주제로 한 명카피들이 모여 있습니다. 혼다의 포스터(2012) 광고, "いつだって 僕らを突き動かすのは 好奇心だ (언제나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호기심이다)."라는 문장이 와닿습니다.


저자는 ‘突き動かす’라는 동사의 힘을 강조합니다. 그저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에서부터 찔러 자극하여 결국 행동하게 만드는 힘을 의미합니다. 이 광고에서는 그 힘을 호기심이라 정의합니다.


언어와 감각, 삶의 태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종의 철학 노트에 가까운 『일본어 명카피 필사 노트』. 광고가 전달하는 문구가 때로는 자기계발서보다 더 직접적으로 삶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필사라는 행위는 모사에 그치지 않고, 글자와 문장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이어주며 변화를 일으키는 자극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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