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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의미를 찾아서 - 양자역학의 세계관을 구축한 과학자들의 도전
폴 핼펀 지음, 강성주(항성)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도서협찬
과학이 단 하나의 이론으로 세계를 설명하려 한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철학에서 출발했습니다. 물리학자 폴 핼펀 저자는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과학적 탐구의 거대한 맥락을 경이롭고도 명쾌하게 정리해냅니다.
빛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서 출발해 양자역학이라는 미지의 심연에 도달하기까지, 그 여정을 따라가며 물리학과 철학, 심리학 등을 아우르는 통합적 관점을 만나게 됩니다.
과학사상 가장 혁명적인 이론이 탄생하기까지의 인간적 드라마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 과학자들의 이론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이 나온 배경과 인물들의 철학적 신념과 성격적 차이까지 묘사하고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먼저 고대 철학자들의 빛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됩니다.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의 거장들이 수백 년간 벌인 논쟁. 지금에서야 보면 웃음이 나올 수 있지만, 그 사고실험이 얼마나 중요한 토대가 되었는지 보여줍니다. 저자는 고대 철학자들의 틀린 직관조차 과학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는 걸 짚어줍니다. 빛의 속도는 유한한가, 태양은 왜 빛나는가와 같은 의문들은 훗날 원자의 발견, 중력의 존재, 운동의 이유를 탐구하는 단초를 제공했으니까요.
중세를 넘어 근세로 오면서 과학은 실험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됩니다.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와 아이작 뉴턴의 등장은 빛에 대한 이해를 한층 깊게 만들었습니다. 케플러의 발견은 인상 깊었습니다. 화성의 궤도가 완벽한 원이 아닌 타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고대의 잘못된 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채 관측 자료가 보여주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과학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이론보다 차가운 데이터를 선택한 순간 현대과학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빛의 속도가 유한한지 밝히는 것은 더 큰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였던 것처럼, 빛의 속도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우주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뉴턴의 운동법칙이 등장하면서 물리학은 놀라운 예측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같은 법칙으로 설명된다니! 19세기 말, 과학계 상당수는 모든 자연현상을 정확한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곧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근본적인 도전을 받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뒤흔들었습니다. 고전역학에 균열을 일으킨 첫 지점이자 이후 양자역학의 출현을 자극한 결정적 모멘텀이기도 합니다.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네 번째 차원으로 더한 4차원 시공간 개념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발상이었습니다. 이론과 실험,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면서 20세기 물리학 혁명을 완성해냅니다. 하지만 더 큰 충격은 양자역학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양자역학의 태동은 고전적 인과성의 붕괴에서 출발합니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자연 자체에 근본적인 불확실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했거든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다고 믿었던 결정론적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파울리의 배타원리,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 등은 단지 과학적 발견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론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이론의 미묘한 철학적 함의에 집중합니다. 양자 얽힘의 개념은 그중 백미입니다. 양자 얽힘은 아인슈타인이 유령 같은 작용이라고 불렀던 현상입니다. 멀리 떨어진 두 입자가 순식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게 말이 될까요? 하지만 실험은 이 기이한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저자는 이 현상이 현재의 양자 컴퓨터 개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카페인 분자 분석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더불어 물리학자들의 직관과 철학적 질문이 결국 실용 기술로 이어졌음을 강조하면서, 과학이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생활로 스며드는 과정을 조명합니다.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에서는 물리학자 파울리와 심리학자 카를 융의 20년에 걸친 교류를 중요한 축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이들의 만남은 친분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과학과 심리학이 만나 탄생한 공시성 개념은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설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학문 간 경계가 허물어지며 지식이 교차할 때 어떤 새로운 사유가 탄생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처럼 이론물리학의 심오한 세계 속에서도 우연처럼 보이는 인간적 만남과 상호작용이 어떻게 과학 이론의 방향을 바꾸었는지를 파고듭니다.
과학자들이 이상적으로 믿었던 자연의 질서, 특히 대칭성이 깨지는 순간을 다룬 챕터도 흥미롭습니다. 패리티 위반(parity violation)의 발견은 자연이 언제나 조화롭고 균형 잡혔으리라는 인간의 믿음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었습니다. 패리티 위반은 과학자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통합 이론의 미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건이었고, 이후 과학은 오히려 불균형과 비대칭의 질서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됩니다.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는 양자역학의 완성으로 과학의 여정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명확히 합니다.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등이 궁극적으로 자연의 단 하나의 이론을 찾고자 했음을 강조하면서도, 그 이론이 반드시 우리가 예측한 형태일 필요는 없다고 시사합니다.
원자보다 작은 세계의 불확정성과 중첩, 얽힘이라는 개념이 이제는 첨단 기술의 근간으로 자리 잡으며 물리학을 넘어 컴퓨팅, 암호, 센서 기술까지 급속히 확장되고 있습니다.
2025년은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입니다. <우연의 의미를 찾아서>는 양자역학 세계관의 이론적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양자적 사고방식이 우리 현실을 어떻게 다시 구성하고 있는지를 조명합니다. 양자과학의 본질적 의미와 철학적 여운까지 짚어내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