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전혜린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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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출판사 버전으로 읽었던 <데미안>. 북하우스 출판사의 <데미안>을 다시 읽은 이유는 전혜린 번역 복원본이기 때문입니다. 1964년 '노오벨賞文學全集'에 수록되었던 전혜린의 번역본이 60년 만에 복원되어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전혜린(1934-1965)은 60년대 지적 여성의 아이콘이자 번역가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31세의 나이로 요절하며 우리 시대의 신화가 된 번역가입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독일로 유학을 떠나 뮌헨대학교 독문과를 졸업 후, 헤르만 헤세를 비롯한 독일 문학의 정수를 한국에 소개한 선구자였습니다.


번역가의 정체성을 말을 옮기는 자에서 사유를 중개하는 자로 격상시켰습니다. <데미안>을 단지 독일어에서 한국어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자신의 생을 이입했고 자아의 고통스러운 성장을 누구보다도 실존적으로 체화한 인물이었습니다.


최초의 독일어 원본 번역자의 숨결을 온전히 되살린 이번 복원본은 전혜린 번역의 원형을 최대한 가깝게 복원했습니다. 외래어 표기와 맞춤법, 오기, 띄어쓰기를 제외하고는 생전에 출간했던 판본을 그대로 되살렸다고 합니다. 이 판본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자 동시에 전혜린의 데미안입니다. 직역의 충실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데미안>은 소년 싱클레어가 유년기에서 성인기로 넘어가는 내면의 여정을 그린 헤르만 헤세의 대표적인 성장소설입니다. 싱클레어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겪으며 도덕과 죄의식, 종교적 억압 속에서 방황합니다.


그런 그에게 데미안이라는 신비로운 인물이 나타나 자신 안의 진실한 자아를 직면하도록 이끌고, 싱클레어는 점차 외부의 규범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형성해 갑니다.





<데미안>의 핵심은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서 시작됩니다. 카인을 악인이 아닌 표식을 가진 특별한 존재로 해석하는 데미안의 시각은 기존 가치관에 도전하는 젊은 세대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독일 남부 칼프에서 선교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신학교를 도망쳐 나온 반항아였습니다. 서점과 시계 공장에서 일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던 그는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데미안>을 출간했습니다. 작가 자신의 반항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인 셈입니다.


싱클레어가 프란츠 크로머에게 협박을 당하면서 지어낸 사과 도둑 이야기는 성장 소설의 전형적 출발점입니다. "드디어 단지 불안에만 빠져 있던 나도 이야기하는 것을 시작했다. 나는 어마어마한 도둑의 이야기를 꾸며 내고 나를 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p.20)라는 이 장면에서 싱클레어의 심리적 동요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동시에 그것이 주는 일종의 해방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청소년기의 거짓말은 어른들이 만든 규칙에 대한 최초의 반항입니다. 싱클레어의 거짓말은 그가 '밝은 세계'에서 '어두운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상징적 사건이며 이후 데미안과의 만남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합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p.158) 이 유명한 문구는 <데미안>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압축한 문장입니다.


성장이란 기존의 안전한 세계를 떠나는 것이며, 진정한 자아 발견을 위해서는 용기 있는 파괴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아프락사스(Abraxas)는 선악을 초월한 신을 가리키는 말로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선 새로운 인식을 상징합니다.


헤세는 1차 대전 후 정신분석의와 상담하며 '자아의 분석'이라는 세계로 떠났고 <데미안>은 바로 이런 경험에서 나온 작품입니다.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 그는 평생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구도자였습니다.





최초의 유학파 한국 여성 독문학자가 독일어 원문을 직접 번역한 최초의 번역본 <데미안>. 이 책에는 전혜린이 쓴 헤세 작가론과 "누구나 한 번은 미치게 만드는 책", "데미안은 확실히 우리 자신의 분신이다"라는 명카피가 등장하는 상세한 작품론이 실려있습니다.


기성 질서에 대한 의문, 진정한 자아 찾기, 개성과 집단 사이의 갈등 등 <데미안>이 다루는 주제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고전이 갖는 생명력을 고스란히 전한 전혜린의 번역 문체도 매력 있습니다.


<데미안>을 읽을 때마다 저는 다른 종류의 알 속에 갇혀 있었고, 그 껍질을 깨는 일은 언제나 아프고 고된 여정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그럴 때마다 성장통은 단 한 번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반복되는 삶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렇기에 <데미안>을 몇 번씩 읽어왔어도 지난번과는 또 다른 읽기 경험을 쌓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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