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의 맛
그림형제 지음 / 펜타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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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퇴근의 맛>은 소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서는 다큐멘터리만큼 생생합니다. 20편의 이야기 속 20명의 인물들은 변호사, 교사, 세일즈맨, 간호사, 군인, 배우, 엄마 등 다양한 직업군에 걸쳐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퇴근 후 식탁 앞에 앉는다는 점입니다. 식사는 일종의 정서적 해방이자 존재의 진심이 드러나는 무대가 됩니다.


저마다의 이야기는 짧은 분량이지만 강렬합니다. 하루치의 피로를 해체하고, 감정을 조리하며, 자기 자신에게 조용히 말 거는 순간. 그 모든 과정이 라면, 짬뽕, 된장찌개, 떡볶이 그리고 카레 한 그릇 등으로 형상화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 「회사원의 우동」은 피로감을 느끼는 직장인의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효율로 판단하지만 정작 비효율의 결정체인 회사 시스템, 고달픈 현실에 이골이 난 주인공은 바보 같은 결정의 여파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우동은 그런 그에게 잠깐의 위로를 안겨줍니다. 맑은 국물, 익숙한 탄수화물, 반복적인 씹는 행위. 그의 하루는 그 맛을 통해 정리됩니다.


교사라는 직업이 지닌 사명감과 현실 사이의 괴리, 인간 존엄성과 직업 안정성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미는 자극적인 짬뽕 한 그릇에 그 모든 갈등을 잠시 맡깁니다. 음식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지 못하는 삶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는 임시방편이 되기도 합니다.


옴니버스 구조 속 은밀하게 이어진 캐릭터들의 서사를 찾아내는 재미도 있습니다. 독립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조연으로 스쳐 지나간 인물이 다른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으로 전환됩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끈들이 이야기를 수놓는 방식은 일상의 연결성과 우연의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 삶도 누군가의 에피소드 안에 들어 있는 건 아닐까라는 유쾌한 상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감정의 파고가 특히 깊었던 꼭지 중 하나는 「수의사의 똠얌꿍」입니다. 민아는 안락사 시켜야 하는 동물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요리에 빗대어 토로합니다. 매운 똠얌꿍은 그날의 울음을 삼키는 동시에 고통을 통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씁쓸한 위로의 맛을 상징합니다.


엄마라는 직업은 정규직도 계약직도 아니며 업무 매뉴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엄마의 떡볶이」 편에서는 소정이 육아에 지친 일상을 잠시 멈추고, 떡볶이와 맥주 한 캔 그리고 TV라는 조합을 통해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유후!"라는 외마디 감탄은 단순한 기쁨이 아닌 한 인간이 다시 자신으로 회귀하는 복원력의 징후입니다.


「작가의 카레」는 퇴근 이후에도 이어지는 업무 피로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냉소적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일상 안에서 발생하는 감정 노동의 핵심을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카레 한 접시에 기대어 그 모든 정신적 피로를 털어냅니다. 이 카레는 현실의 고단함을 직시하되 그것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자 하는 마지막 저항이자 의식입니다.





이 책은 말 많은 위로보다 더 효과적인 침묵의 온도를 알고 있습니다. 대놓고 감정 소비를 강요하지 않고, 작은 디테일과 단단한 묘사를 통해 진짜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각각의 꼭지는 하나의 짧은 소설처럼 읽히면서도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직장과 삶의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책 말미에 소개된 작가 추천 맛집은 이야기의 여운을 현실로 연장시킵니다. 실제로 그 장소를 찾아가 주인공이 되었던 인물의 기분을 간접 체험하게 만듭니다.


하루가 끝날 무렵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라고 묻는 모든 직장인을 위한 <퇴근의 맛>. 직업의 종류나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삶의 언저리에서 위로 한 숟갈이 필요한 이들에게 공감과 여운을 선사합니다.


음식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관계, 자아, 정체성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감정의 여백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이 잘 어울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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