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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 창의성은 어떻게 현대사회의 중요한 가치가 되었는가
새뮤얼 W. 프랭클린 지음, 고현석 옮김 / 해나무 / 2025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만능 키워드처럼 보이는 창의성. 유아 교육부터 마케팅, 공공정책과 IT 산업 등 창의성이 요구되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습니다. 새뮤얼 W. 프랭클린은 창의성이 과연 우리가 믿는 그 개념과 동일한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창의성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시대정신과 정치성을 해부합니다.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는 창의성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살피고, 이를 둘러싼 사회와 역사 속 배경을 함께 되짚는 책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1950년대 이후 급조된 문화적 산물임을 짚어줍니다. 1950년 미국 심리학회 연례 회의에서 당시 회장이었던 조이 폴 길퍼드Joy Paul Guilford는 창의성 연구가 '놀라울 정도로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이후 창의성 연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10년 만에 관련 논문과 서적이 심리학 역사상 전무후무한 속도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회적 필요에 의해 개념이 만들어지고 그 개념이 다시 사회를 바꾸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흥미로운 점은 창의성이 엘리트 천재들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이 가진 잠재력으로 재정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대중사회의 획일화에 대한 우려와 직결됩니다.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주의를 구원하려 했던 겁니다.
창의성은 천재성과 평범함을 잇는 브리지로, 누구나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자기실현이라는 인간 중심의 개념과 결합하면서 창의적인 인간이라는 이상형이 탄생했습니다.
창의성은 곧 기업 경영과 교육 정책의 중심 키워드가 됩니다. 시넥틱스 기법과 브레인스토밍이 대표적입니다. 광고업계의 렉스 오즈번은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단어를 군대가 해변을 기습 공격storm하는 군사적 이미지에서 착안해 도입했고, 회의 중에는 직급을 없애고 비판을 금지하며 자유로운 아이디어 생산을 유도했습니다. 창의성은 수직적 조직에서 수평적 아이디어를 촉진하는 수단이었고, 기업 경영의 신선한 혁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칼 로저스로 대표되는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창의성을 자기실현의 핵심 요소로 제시했습니다. "대중은 지루한 노동에 매몰되었으며, 여가 시간마저 '수동적'이고 '획일적인' 활동으로 채워지고 있었다"라며 포드주의 대량생산 체제가 개인에게서 삶의 의미를 빼앗는다고 우려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창의성은 노동 소외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는 해방의 도구로 포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결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동력으로 활용되었음을 포착합니다. 개인의 자기실현 욕구가 기업의 혁신 동력으로 전환되는 교묘한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입니다.
창의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하려는 시도로 기업 경영에 등장한 시넥틱스(Synectics) 기법 역시 모든 일은 즐거움과 열정으로 가득 찰 수 있다라는 말 뒤에 숨겨진 게 있었습니다. 결국 직원들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하도록 만드는 교묘한 전략이었다고 말이죠. 열정페이의 원조 격인 셈입니다.
교육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창의성은 더 이상 예술가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교육 정책과 커리큘럼 전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창의적인 학생은 장차 자율성과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인재로서 사회의 미래로 간주되었고, 교육은 이 가능성을 실현하는 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창의성 교육이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엘리트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창의성 개념이 과도하게 소비되면서 1960년대 말 창의성에 대한 회의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창의성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의 진화를 의미했습니다. 냉전 시대의 군산복합체에서 창의성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은 충격적입니다. 미사일 광고조차도 창의성이 얼마나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엔지니어링 분야에서는 예술가적 이미지를 지닌 엔지니어가 이상적인 인물로 부각되었습니다. 냉전 시대 무기 개발의 핵심에 있던 엔지니어들이 창의성이라는 포장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 것입니다.
현재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들의 CEO들이 스티브 잡스 같은 아티스트 CEO로 포장되는 현상과 유사합니다.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마케팅 전략이 된 것입니다.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는 창의성이 어떻게 현재의 창의적 경제 패러다임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의적 산업, 창의적 계층, 창의적 도시 운동을 포함한 창의적 경제 패러다임은 전후 시대의 대중문화 비판이 성숙기에 접어들며 얻게 된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홍대 앞의 클럽가가 창의적 도시의 상징이 되고, 스타트업 밸리가 혁신의 성지로 여겨지는 현상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의성은 단순한 개인의 능력을 넘어 도시 전체의 브랜딩 전략이 된 것입니다.
창의성이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문화적 산물임을 보여주는 <창의성에 집착하는 시대>. 저자는 창의성이 어떤 의심스러운 사업을 미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물론 창의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창의성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안겨줍니다. 창의성이라는 개념 하나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