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괴물 사기극 (저자 친필 사인 수록) - 거짓말, 실수, 착각, 그리고 괴물 퇴치의 연대기
이산화 지음, 최재훈 일러스트 / 갈매나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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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칼 린나이우스가 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며 자연의 질서를 확립한 18세기부터 베르나르 외벨망이 미지의 동물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개척한 20세기 중반까지. 220년에 걸친 이 장대한 여정에서 괴물들은 어떻게 생존해왔을까요?


이산화 작가의 <근대 괴물 사기극>은 사기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악의적인 속임수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실수, 착각, 그리고 괴물 퇴치의 연대기'라는 부제처럼 인간이 괴물을 상상하고, 믿고, 만들어내고, 또 부정해온 복잡다단한 과정을 탐구합니다.


띠지가 두툼해서 펼쳐보니 책 속 일러스트가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SF, 공포 소설로 저도 몇 번 접했던 이산화 작가는 4년간의 자료 수집과 고증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괴물 연구를, 『파묘』의 아트디렉터 최재훈은 괴물의 시각적 재현을 멋지게 해낸 흑백 일러스트로 이 책을 빛나게 만듭니다.





존재하지 않음에도 언제나 존재해온 괴물. <근대 괴물 사기극>은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괴물들이 하나둘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재현합니다. 허무맹랑한 전설 파헤치기에 그치지 않고 괴물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인식, 욕망, 권력과 맞물렸는지를 분석하고 있어 흥미진진합니다. 500쪽에 달하는 이 논픽션은 괴물의 해부를 통해 인간을 해부하는 책입니다.


괴물 연대기의 기점은 스웨덴 식물학자 칼 린나이우스의 함부르크 히드라 퇴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괴물을 퇴치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생물 분류 체계를 정립한 린나이우스는 신화적 괴물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거부합니다. 과거에는 종교적 권위나 도덕적 판단으로 괴물을 배척했다면, 드디어 과학적 분류법과 실증적 증거로 괴물의 존재 가능성을 검증하기 시작한 겁니다.


과학의 발전이 괴물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8세기 이후의 괴물들은 더욱 교묘해졌습니다. 동굴인간, 지옥분노벌레, 튀르크인 같은 존재들은 모두 당시의 과학적 지식과 사회적 맥락을 교묘히 활용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했습니다. "동굴인간이 자연의 체계 속 본래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인간과 아주 닮았지만 결코 인간은 아닌 존재'가 탄생하는 이야기에 매혹되었다"라며 괴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변신한다는 걸 짚어줍니다.


산업혁명 이후의 호황과 대도시의 등장, 대중매체의 발달은 괴물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냈습니다. 1822년 바넘의 피지 인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바넘이 가짜 괴물을 만든 것을 넘어 과학적 권위까지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넘은 가짜 과학자를 내세워 언론을 속였고, 한때 괴물을 퇴치하는 데 쓰였던 과학의 언어는 오히려 괴물의 아군으로 뒤바뀌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가짜 뉴스 현상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권위 있는 정보원을 가장하고 그럴듯한 과학적 용어를 남발하며 대중의 호기심과 편견을 자극하는 수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담배 상인 조지 헐이 성경의 골리앗 이야기를 믿는 기독교도들을 상대로 벌인 카디프 거인 사기극은 종교적 믿음과 상업적 욕망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신문의 등장으로 정보 전파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고, 괴물 이야기는 더욱 확산됩니다. 1835년 뉴욕 《선》지의 달의 박쥐인간 보도가 대표 사례입니다. 더불어 천문학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태고의 생존자 패러다임으로 만들어진 게 바로 네스호의 괴물이나 콩고의 브론토사우루스 같은 괴물들입니다.


<근대 괴물 사기극>의 진짜 가치는 괴물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동굴인간 이야기 속에는 인종주의가, 필트다운인 사건 속에는 제국주의적 우월감이, 드 루아의 유인원 사진 속에는 편견과 혐오가 숨어 있습니다.


1차 대전 이후 코팅리 요정 사건도 인상 깊었습니다. 전쟁의 후폭풍 속에서 상처 입고 지친 어른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요정의 세계가 어린아이의 상상 속만이 아닌 현실에도 존재하리라고 필사적으로 믿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분석이 공감됩니다. 괴물에 대한 믿음이 절망적 현실에 대한 심리적 방어막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오랑우탄의 뼈를 인류 조상의 화석이라 조작하며 40년 간 속였던 필트다운인 사건에서도 비슷한 맥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뻔한 거짓말조차 믿고 싶다면 수십 년 동안이나 굳게 믿어버릴 만큼 나약한 만물의 영장 인류의 본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저자는 1955년 현대 괴물 연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르나르 외벨망을 근대 괴물사의 종료점으로 설정합니다. 외벨망은 『미지의 동물을 찾아서』를 통해 괴물들의 존재 가능성을 재검토하며 가능성 있는 괴물을 과학적으로 구제하려 했습니다.


린나이우스의 히드라 퇴치가 근대 괴물 퇴치의 서곡이었다면, 외벨망의 로우 퇴치는 괴물 복권의 카운터파트였던 겁니다. 이 둘은 괴물이 과학과 어떻게 충돌하고 또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사례라고 합니다. 결국 괴물이 사라진 게 아니라 시대마다 달리 재정의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가짜 뉴스, 음모론, 딥페이크로 대변되는 디지털 환경은 과거 신문, 라디오 방송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과학적 권위를 가장한 허위 정보의 유통, 사회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과학적 근거의 남용, 상업적 이익을 위한 대중 조작 같은 현상들은 모두 근대 괴물 사기극의 현대적 변주입니다. 진위 여부보다 화제성이 우선시되는 정보 생태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럴듯한 괴물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화의 시대에서 근대의 시대로 넘어오며 괴물은 더 이상 마법이나 신벌의 대행자가 아닌, 과학의 실험대 위에서 해명되어야 할 오류가 되었습니다. <근대 괴물 사기극>은 그 전환의 순간에서 거짓과 착각, 실수와 조작이 한데 엉킨 사기극의 무대를 생생히 복원해냅니다.


괴물은 실재하지 않지만 괴물에 대한 믿음은 실재했습니다. 괴물의 존재를 믿게 만드는 힘은 결국 인간의 심리적, 사회적 조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산화 작가는 이 믿음의 작동 방식까지 추적하며 괴물 이야기가 인류 인식의 오류 연대기임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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