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 숲의 말을 듣는 법
김용규 지음 / 디플롯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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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우리 곁에 항상 있어 익숙해져버린 존재, 숲. 익숙하다고 해서 우리가 숲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숲의 철학자로 불리는 김용규 저자는 20여 년간 숲을 스승으로 삼아 철학과 삶의 본질을 탐색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은 숲이 단지 풍경이 아니라 말 없는 스승이자 우리 존재의 거울이라는 사실입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는 우리가 늘 곁에 두고 있지만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숲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무자천서(無字天書)'라 불리는 숲으로의 여정을 안내합니다. '무자천서'란 '하늘이 쓴 글자 없는 책'이란 뜻으로 인간의 언어가 아닌 자연의 언어로 기록된 지혜의 책을 의미합니다.


숲에는 바르고 윤택한 삶의 지혜가 새겨져 있고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가 흐르고 있음에도 우리는 너무 익숙해서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저자는 생명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단지 효용성이나 심미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타자의 대상화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국을 그저 차나 술을 담그는 재료로 또는 화병에 꽂아둘 관상용품으로만 인식합니다. 이런 시선은 그 꽃의 존재 가치와 삶의 방식을 온전히 보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산국은 왜 서리를 맞으면서도 피어나는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저자는 타자의 사연을 헤아리는 마음을 짚어줍니다. 새로운 시선으로 숲을 바라볼 것을 권합니다. 이는 사물의 겉모습 너머, 존재의 이유를 묻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굴곡 없이 찾아오는 계절이 어디 있던가요. … 겪어내야 할 것들 다 겪으며 겨우 붙들어낸 것들만이 농익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처럼 삶의 진실 중 하나가 바로 온갖 풍상을 견디고 나서야 평화의 시간이 찾아온다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냉이의 생존 전략 역시 이를 잘 보여줍니다. 키 큰 풀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냉이는 가을에 발아해 겨울을 견딘 후 꽃을 피우는 전략을 택합니다. 그 과정은 가혹하지만 절실합니다. 삶의 숙제는 그렇게 생겨납니다. 모든 생명은 불완전한 서식지에서 버티며 자라납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너무 쉽게 ‘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그 익숙함이 정말 앎이 맞는지 묻습니다. 숲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은 각자의 이유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 다채로운 사연에 귀 기울이는 일은 단순한 관찰을 넘어선 경청의 행위입니다.


여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눈부시게 피는 여름꽃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합니다. 오동나무는 태풍이 잦은 환경에 맞서 살아가는 법을 진화시켰습니다. 이 모든 사연은 결국 삶의 방식을 묻는 질문이자 우리가 놓치고 사는 삶의 깊이에 대한 초대입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는 숲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존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곧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는 일입니다. “산다는 건 자신에게 부여된 그 숙제를 차곡차곡 풀어가는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불안과 흔들림 속에서도 기어코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에게서 중요한 특징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가해자가 살고 있지 않습니다.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속의 가해자와 오래오래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억울, 원망, 비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억울한 일이 없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의 방 안으로 가해자가 들어와 함께 살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 p170


왜 이 세상에는 삶의 숙제가 존재할까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그 자리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풀어내야 할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양분이 풍부한 곳에는 햇빛이 모자라거나 바람을 맞기 어렵고, 햇빛을 넉넉히 받을 수 있는 곳에서는 양분이 부족하거나 물을 얻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한 곳은 없으며 설령 그런 곳이 있다 해도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은 특정 생명에게 특혜를 주지 않으며 모든 생명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역경에 적응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대나무는 속을 비움으로써, 또 다른 생명은 부드러움을 갖춤으로써 자연의 질서에 발을 맞춥니다.


저자는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다정한 인사말이 사실은 가장 허무한 인사말이라고 말합니다. "꽃길만 걸을 수 있는 세계는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의 삶이 그렇듯, 누구에게나 시련과 고난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이죠. 오히려 오동나무처럼 역경을 다루며 살 수 있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2025년 여의도의 166배에 달하는 면적이 사라진 경북 일대 대형 산불을 언급하며 자연 파괴의 비극을 환기합니다. 실제로 파괴되고 있는 자연환경에 대한 우려와 동시에 생명력을 잃고 피폐해진 인간 삶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이처럼 황폐해진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숲에서 찾습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보편적인 질서, 먹고사는 일을 넘어서는 숭고하고 초월적인 삶의 모범, 더불어 사는 비결 등이 모두 숲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천천히 숲의 심부를 향해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걸었습니다>. 의미가 소실되어가는 시대에 숲 생명들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삶을 돌아보는 것은 생기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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