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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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중세 기사에서 한국형 기병으로, 우리가 기다려온 '바로 여기가 원본인 세계'를 구현하고자 한 실험의 결정체 <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작가가 데뷔 20주년을 맞아 선보인 대작입니다. 서양 판타지의 복제품이 아닌 아시아적 상상력이 깃든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이 소설을 위해 작가는 역사학과 군사학 논문을 수십 편 참고하며 마목인, 초원, 온돌과 같은 요소를 고스란히 녹여냈다고 합니다. 판타지는 서양이 원본인 세계로 익숙하지요. 이제 우리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기병과 마법사>입니다.


영민하고 단단한 27세 여성 영윤해는 그 자체로 저항과 연대의 상징입니다. 윤해는 왕의 형인 영유의 딸로, 아버지가 동생인 왕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살아가는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강요된 혼사를 앞두고 잔혹한 약혼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도 몰랐던 마법적 능력을 발휘합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힘을 일깨운 정체불명의 목소리. 이 장면은 억압된 주체가 자각하는 순간을 상징합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마법으로 커다란 곰개를 불러내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운명에 굴복하는 대신 각성의 서사가 시작됩니다.


전형적인 선택받은 자의 영웅상을 넘어섭니다. 윤해는 타고난 힘을 가진 영웅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혜와 결단력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윤해는 유배와 다름없는 처지로 늘 전투가 일어나는 변방으로 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윤해에게 중요한 인물, 기병 다르나킨을 만나게 됩니다. 전통 판타지의 기사와 달리 몽골 기병을 떠올리는 묘사가 일품입니다.


작가는 기사라는 외형을 기병으로 바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사 정신의 실천 방식 자체를 변형했습니다. 다르나킨은 절제된 무력과 단단한 신의를 상징하며 윤해의 조력자가 됩니다.


마목인 출신 다르나킨은 경작인 세계와 마목인 세계 양쪽 모두에 발을 딛고 있는 자입니다. 한편으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처지인 셈이라 윤해와 다르나킨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시대와 싸우는 동지적 연대로 구현됩니다. “대감께 세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윤해의 대사는 오랫동안 마음을 울립니다.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초원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거문담이라는 미스터리한 옛 유적과 세계의 파멸과 관련된 신비로운 주기 1021이라는 숫자입니다. 1021의 비밀은 북유럽 신화의 종말을 뜻하는 라그나로크를 떠올리게 됩니다.


거문담의 미스터리는 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루며 끊임없이 궁금증을 갖게 합니다. 이 거대한 인공물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윤해의 여정이 흥미진진합니다. 1021이라는 숫자는 세계관을 연결하는 비밀의 키워드로 작용하며 윤해의 존재와도 연결됩니다.


배명훈 작가는 인간 중심의 서사보다는 작동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고 연대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 세계는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인물과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그렇기에 책장을 덮을 무렵엔 윤해 한 사람의 영웅 코스프레가 아니라 연결과 협력의 가치를 잘 보여준 스토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윤해와 다르나킨이 싸우는 대상은 단지 괴물이나 전쟁이 아니라 체제 그 자체입니다. 권력이 어떻게 공포를 통해 통치하는지, 폭군 왕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에피소드는 판타지의 외피를 입은 정치 소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서양의 판타지 문법을 따라 하지 않고도 충분히 재미와 긴장감을 유지하는 <기병과 마법사>. SF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지만 요즘 즐길 여유를 잊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그 재미를 만끽하며 읽었습니다.


전투 장면은 박진감 넘치며 인물들은 입체적이고 세계관은 자족적입니다. 분명 중간중간 힌트가 있었음에도 아하! 하는 깨달음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얻게 되니 이 또한 끝까지 떡밥을 놓치지 않고 끌어가는 배명훈 작가의 노련함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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