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계엄령의 밤 이후, 우리는 어떤 한국을 상상할 수 있을까... 김영민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시국 평론도, 역사 교양서도 아닙니다.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능한 미래를 사유의 대상으로 밀어 올립니다.


대통령의 불법 계엄령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통해 우리가 당연시해온 한국 사회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 성찰하게 합니다.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 질문은 대개 위기의 순간에 제기됩니다. 김영민 교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이 책은 현시대 한국 사회의 균열을 직시하며, 우리가 그동안 한국을 이해해온 방식 자체를 되묻습니다.


김영민 교수는 "21세기의 한국은 정치의 실패이자, 헌정의 실패이자, 법치의 실패이자... 한국을 이해해온 방식의 실패이기도 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한국을 설명해온 '안이한 언어'와 '게으른 상상력'을 넘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고 합니다.


1부 한국의 과거에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한국의 역사적 개념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합니다. 단군신화에 대한 분석이 신선합니다. 단군신화가 "외부 문명에 의해 정복당한 민족의 기억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신의 권위를 끌어온 정치적 서사일 수도 있다"라고 말합니다. 민족의 기원에 대한 단일한 내러티브를 거부합니다.


삼국시대라는 개념도 재고됩니다. 이 용어가 고려 시대 엘리트 김부식의 관점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수십 개의 소국이 혼재했던 시대였음을 상기시킵니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온 역사적 용어와 개념들이 사실은 특정 관점과 권력이 구성한 선택적 기억임을 짚어줍니다.


"역사는 결국 오늘의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이고,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사태는 달리 보인다."라는 문장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역사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권력과 욕망이 개입하는 선택적 내러티브임을 예리하게 지적합니다.


"유교랜드는 과거의 한국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현대 한국을 보여주는 곳이군."라는 문장으로 한국의 유교 전통에 대한 해석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빌려, 안동의 유교랜드는 한국 전체가 유교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있는 곳이라고 해석합니다. 우리가 과거와 맺는 관계가 얼마나 선별적이고 재구성된 것인지 보여줍니다.


노비 제도에 대한 고찰도 흥미롭습니다. 그토록 많은 노비가 실존했으나 현대 한국에서는 노비의 자손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을 지적하며, 역사적 기억의 선택성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드러냅니다.





2부 한국의 현재에서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파헤칩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언론의 무기력, 교육의 붕괴, 정당정치의 무능력 같은 진단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왜 반복되는지 구조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중심엔 ‘언어의 고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개혁, 정의, 민주주의 같은 단어들이 관성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언어의 공허함 속에서, 시민의 참여는 무력해지고 공론장은 혼탁해지며, 결국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특히 쿠데타에 대한 분석은 날카롭습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쿠데타가 아니라 법을 초월하는 것이 쿠데타다."라고 합니다. 미셸 푸코의 통찰을 빌려, 저자는 쿠데타의 본질이 단순한 위법이 아니라 "법 자체를 가능케 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반복된 군사 쿠데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혁명의 종결 문제도 흥미롭게 다룹니다. "혁명은 일어났으나 혁명이 약속한 세상이 오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외친다."라고 말한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의 말을 인용하며, 한국 사회가 혁명을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고 진단합니다.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가 왜 계속해서 구조적 불안정성을 경험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한국의 근대화, 대학, 청년, 어른, 이민 등 현대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도 비판적으로 재검토됩니다. 특히 한국 청년들의 실존적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세대 간 단절과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3부 한국의 미래는 그저 미래 전망이 아닌 한국이라는 이름으로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사유 실험입니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규정짓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갈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개혁에 대한 접근이 인상 깊었습니다. "한국 사회는 꾸준히 계몽에 의존해왔다. 너도 나도 외쳐왔다. 정신 차려! 머리에 힘줘!"라고 말하며, 의식 변화를 통한 사회 개선이라는 계몽주의적 접근이 한국 사회에서 실패했음을 지적합니다. 도덕적 우위에 선 계몽 담론을 비판합니다. 대신 지금과 다른 삶이 합리적이라 느껴질 때 변화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김영민 교수는 주어진 이분법적 선택지에 갇히지 말 것을 조언합니다.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새롭게 상상하고 재구성할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수성, 새로운 시선이 없다면, 한국이라는 이름조차도 미래를 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영화 그랜 토리노를 통해 보수의 새로운 가능성도 모색합니다. 단순한 이념적 대립을 넘어, 보수와 진보가 함께 공존하고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한국이란 무엇인가>는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환상을 버리고 '지금 여기'의 공동체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책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국이란 무엇인가>에서 과거-현재-미래는 단순히 시간적 구분이 아니라, 한국 사회 구조를 시간의 층위를 통해 해부하고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현재의 욕망과 권력이 재구성한 기억의 서사이며, 현재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특정 언어와 제도가 구성한 살아있는 현실인 겁니다. 그리고 미래는 예측이나 전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는 상상의 지평입니다.


왜 우리는 반복적으로 무력한 정치를 선택하는지, 왜 공동체는 더 이상 연대하지 못하는지. 묵직한 주제이지만 다양한 문화적 사례를 통해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능력이 돋보이는 김영민 교수의 글은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근본적인 성격과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게 만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