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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택 - 공동체를 설계하는 건축
야마모토 리켄.나카 도시하루 지음, 이정환 옮김, 박창현 감수 / 안그라픽스 / 2025년 3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오늘날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재산 증식의 도구,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내 집 마련이라는 삶의 목표를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 1인 가구 증가, 세대 간 자산 불평등 등의 문제로 인해 기존의 주택 모델은 점점 더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탈주택>은 집을 반드시 소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집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합니다. 전통적인 1가구 1주택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개인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야마모토 리켄, 지역 커뮤니티를 강조한 작품을 설계하는 나카 도시하루 저자들은 일본의 건축 개념 중 하나인 ‘시키이(閾)’를 통해 집의 경계를 유연하게 바라볼 것을 제안합니다.

‘시키이’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사회적, 심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을 의미합니다. 거주자의 삶의 방식에 따라 집의 역할이 변화할 수 있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결국 저자들이 말하는 탈주택이란 프라이버시에 지나치게 편중된 거주전용주택에서 벗어나자는 건축적 대책입니다.
"경계는 단순한 물리적 선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공간을 이해하고 관계를 형성하는지에 대한 방식이다." p87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주거 형태, 한 가족이 하나의 닫힌 공간에서 살아가는 1가구 1주택 방식은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19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력 관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시스템이었던 겁니다. 행복한 주거 양식을 위해 탄생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안에 완벽하게 수용되고 갇혀버린 겁니다. 핵가족 중심 주거 형태가 사실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인위적 설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오늘날 주택은 철저한 프라이버시 보호를 최우선으로 설계됩니다. 높은 담장, 굳게 닫힌 철제 현관문, 두꺼운 벽은 외부와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내부의 사생활을 보호합니다. 이웃과의 관계 형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합니다. 저자들은 현대 주택의 이러한 폐쇄성이 사회적 고립과 단절을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이웃과의 교류는 줄어들고, 층간 소음이나 주차 문제 같은 갈등은 오히려 증가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합니다.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의 단절과 고립이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건축과 주거 설계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임을 시사합니다. 저자는 자신을 포함한 건축가들이 지난 세기 동안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해온 주거 모델이 공동체의 해체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시키이라는 공간은 완전한 개방도, 완전한 폐쇄도 아닌 중간 영역을 만들어 이웃과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가능하게 합니다. 무조건적인 공유나 개방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프라이버시를 유지하면서도 외부와의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는 섬세한 균형을 추구합니다. 전통 한옥 사랑방이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자 가족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과의 교류 통로로 기능했던 것처럼, 시키이는 현대적 맥락에서 이 역할을 재창조합니다.
오늘날 주택은 단순히 소비되고 잠만 자는 장소로 전락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도 말합니다. 탈주택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는 집을 고립된 사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장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동체적 주거 모델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유대감을 조화롭게 만듭니다. 특히 노인, 청년, 1인 가구 등 다양한 계층이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최근 유럽과 일본에서는 공유주택과 다세대 주거 모델이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건축가의 역할을 물리적 공간 설계자에서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의 설계자로 확장합니다. 이들에게 건축은 단순한 기술이나 미학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실천적 도구입니다. <탈주택>에서는 야마모토가 설계한 7개의 건축물과 나카가 설계한 2개의 건축물을 분석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야마모토가 한국에서 진행한 '판교하우징'과 '강남하우징' 프로젝트입니다. 한국의 공영주택에 시키이 개념을 적용하고, 거주민 간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촉진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판교하우징에서는 공용 데크를 통해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고, 강남하우징에서는 작은 광장과 옥상 텃밭 등 다양한 공유 공간을 통해 커뮤니티 형성을 도모했습니다.
나카의 '식당이 딸린 아파트'는 주택과 경제의 통합이라는 그의 이론을 실천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건물의 1층에는 식당이 있고, 주민들은 필요에 따라 이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합니다. 어떤 이는 손님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요리 솜씨를 뽐내며 작은 장사를 시작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주택 안에 경제 활동의 가능성을 내장함으로써, 단순한 거주 시설을 넘어선 공동체적 공간이 탄생합니다. 저자는 서울 홍은등의 집합주택 써드플레이스 6 기본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야마모토와 나카가 제안하는 공동체는 단순히 친목을 나누는 이웃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경제적·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공동체입니다.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공동체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 두 건축가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궁극적으로 집의 개념을 소유에서 거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탈주택>. 주거권을 보장하면서도 개인의 삶의 방식에 맞춘 유연한 주거 형태를 마련하는 것이 미래 주택 정책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탈주택 개념은 단순히 부동산 정책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집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며, 이에 따라 우리의 사고방식 또한 변화해야 한다고 말이죠.
"주택을 투자 대상으로 삼는 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주거 안정성을 가질 수 없다." - p176
한국 사회에서 1가구 1주택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주거 형태를 넘어 부동산 투자와 자산 증식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의 인구 변화와 주택 시장 변동, 1인 가구 증가, 고령화 등은 핵가족 중심 주거 모델의 한계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탈주택>의 메시지는 주택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합니다. 주택을 공동체적 삶의 기반으로 재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주거 형태가 자연스러운 것도, 최종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일깨웁니다. 1가구 1주택 모델은 특정 역사적 맥락에서 등장한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고 말이죠.
주택을 넘어 삶을 설계하는 건축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탈주택>. 건축가뿐 아니라 도시계획가, 사회학자 그리고 더 나은 주거 환경과 공동체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유용한 참고서가 될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