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와 베끼기 -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아일린 마일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디플롯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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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퀴어 시인 아일린 마일스가 전하는 글쓰기의 새로운 혁명 <낭비와 베끼기>. 아일린 마일스(Eileen Myles)는 1949년생 미국의 시인이자 예술가로, 전방위적 글쓰기를 통해 미국 현대시단과 퀴어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특히 1992년 미국 대선에 노동계급 퀴어 예술가로서 출마하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현재 70대의 나이에도 뉴욕을 기반으로 활발한 작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멋진 작가입니다.


마일스는 <낭비와 베끼기>에서 도발적인 주장을 펼칩니다. "문학은 낭비된 시간이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문학은 "도덕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허무주의적 선언이 아니라, 자본주의 논리와 생산성을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강한 저항의 의미를 담은 말입니다. "작가가 되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들고, 그렇기에 시간을 굴릴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마일스에게 글쓰기는 실용성이나 효율성을 넘어선 행위입니다.


그 낭비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선을 발견하고, 기존의 사고를 전복하는 힘을 얻게 되니까요. 글쓰기를 통해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들이 가장 가치 있는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마일스는 설파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는 '쓸모 있음'의 반대편에 서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합니다.


마일스의 또 다른 핵심 주장은 '베끼기(copy)'입니다. "모든 예술은 삶과 관련하여 창조되며, 우리는 그 삶에 감동받고, 글쓰기는 그러한 경험을 '베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베끼기'는 단순한 모방이 아닌, 현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창조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글쓰기는 삶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삶을 변형시키는 힘을 가지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일스의 퀴어적 관점과 정치성에 대해서도 잘 묻어있습니다. "노동계급 출신의 퀴어 예술가와 같은 반사회적 존재들의 불결함과 변칙성은 표백된 정상성 자본의 옆자리에서 더욱 역동적으로 가시화되기 마련"이라며, 주류 사회의 규범에 저항하는 존재로서의 퀴어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예술이 단순한 표현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폭로하고 저항하는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부록으로 실린 조이 레너드의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는 마일스의 1992년 대선 출마를 지지하며 쓰인 시입니다. 기존 정치 구조를 비판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는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입니다. 마일스가 강조하는 글쓰기의 목표를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글쓰기는 ‘지금-여기’의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고, 개인의 삶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마일스의 글쓰기에서 뉴욕이라는 도시 공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가난한 이들을 밀쳐대며 나아가는 대도시 뉴욕의 실체"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상징하며, 이는 '지금 여기의 도시'로 확장됩니다.


독특한 점은 '불결함'을 긍정한다는 것입니다. "어수선하고 불결한 세계들이 모인 공공건물"이라는 표현처럼, 정돈되고 깔끔한 것이 아닌 혼돈과 무질서를 받아들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진정성 있는 글쓰기를 위한 필수 요소로 제시됩니다.


"우리에게는 가난한 사람들, 대안적인 사람들, 엉망진창인 사람들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마일스의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불완전하고 주변화된 존재들은 오히려 "삶의 목적을 가시화시키는" 중요한 주체인 겁니다.


마일스의 글쓰기에서도 그 철학은 묻어 나옵니다. 전통적인 서사 구조나 문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단편적인 이미지와 즉흥적인 문장을 통해 현실을 포착합니다. 기존 문학의 형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를 실험하는 과정입니다.





문학의 존재 방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책 <낭비와 베끼기>. 글쓰기를 통한 자기 발견의 여정을 색다르게 만나는 시간입니다. 아메리칸 언더그라운드 문학의 상징적 인물이자 퀴어 문학의 선구자 아일린 마일스가 들려주는 글쓰기의 본질을 만나보세요.


세상의 모든 아웃사이더들을 위한 글쓰기 선언문 <낭비와 베끼기>. 타협하지 않는 글쓰기의 전설 아일린 마일스의 철학은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한 예술가의 치열한 고백록이자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입니다.


한국어판에는 김선오 시인의 서문 『불결한 삶을 베껴 쓰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노동 계급 출신의 퀴어 예술가와 같은 반사회적 존재들의 불결함과 변칙성은 표백된 정상성 자본의 옆자리에서 더욱 역동적으로 가시화되기 마련"이라는 시인의 통찰은, 마일스의 글쓰기가 한국의 맥락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를 짚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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