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해부하는 의사 - 영국 최고의 법의학자가 풀어놓는 인생의 일곱 단계
리처드 셰퍼드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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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건의 법의학적 조사에 참여한 영국 최고 법의병리학자 리처드 셰퍼드의 에세이 <죽음을 해부하는 의사>.


우리 인생을 7단계로 구분된 연극에 비유한 셰익스피어 희곡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 대사를 인용하며 유아부터 노인까지 인간 존재의 여정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사례를 들려줍니다.


"맨 처음은 어린애, 유모 품에 안겨 칭얼대며 토악질을 합니다."라는 희곡 대사처럼 처음 소개하는 사건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죽은 아기 사건입니다. 유아돌연사증후군일까? 방임일까?


저자는 이 아기가 선천성 대사 결함을 갖고 태어났음을 밝힙니다. 고형식을 시작하자 과당을 대사할 수 없었기에 탈이 나버린 겁니다. 부모도 몰랐습니다. 여기서 반전 두둥!


부모 둘 다 일반 의학을 불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기는 예방접종을 맞은 적도 없고 진찰받은 적도 없습니다. 대체의학 치료사인 아버지의 뿌리 깊은 신념이 육아에 영향을 미친 겁니다. 사실 아기가 가진 질환은 식단 조정만으로 해결되는 질환임에도 신념에 따라 의사에게 가지 않은 겁니다.


이처럼 영적 치료사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꽤 많다고 합니다. 저자의 사촌도 치료 가능한 암을 치료하지 않은 채 영적 치료사에게 전 재산을 바치고 결국 1년도 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성인의 선택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버지의 신념 때문에 아이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비극의 희생양이 되는 아이들 사건은 이처럼 많습니다. 벽과 매트리스 사이로 미끄러져 질식한 아기, 술에 취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아빠의 팔에 안겨 있던 아기, 아기를 안고 있던 엄마가 반려견에 걸려 넘어지면서 떨어진 아기, 부모가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에 욕조에서 익사한 아기 등 보살핌 소홀로 죽은 아기들. 엄청난 불운과 극단적인 부주의 사이에 속하는 사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학대 사건처럼 누군가의 의도로 죽은 아기들 사례에서는 왜 부모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영아 살해자가 보이는 공통된 특징을 짚어주기도 합니다. 가출 가방을 들고나간 7세 소녀가 공원에서 죽은 사건에 담긴 비밀도 경악스럽습니다.


자연적, 비자연적 원인으로 숨진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이 사람이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고자 죽음을 파헤치는 의사로서의 소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죽은 이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따뜻한 연민이 있습니다. 부검 과정 자체는 냉철하지만 인체의 복잡하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대신 유족을 동정하진 않습니다. 그들도 부적절한 동정을 받으러 오진 않는다고 합니다. 친절하지만 냉정하게.


📚 무게를 재기 위해 앤드루의 뇌를 들어 올렸을 때 내 손에 만져진 느낌은 말랑말랑함과 단단함의 독특한 조합이었다. 뻑뻑한 요거트와 비슷할까? 아니다. 그렇게 질척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젤리? 절대 아니다. 뇌는 흔들거리지 않는다. 라이스 푸딩? 딱히 그렇지는 않다. 뇌는 집어서 내려놓고 뒤집어도 모양이 유지된다. 아니면 연성 치즈? 비슷하다. 어쩌면 뇌는 그냥 뇌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비교가 불가한 유일무이한 것. - p173


혈기왕성한 십 대와 이십 대, 삶의 중압감을 느끼는 중년 등 파란만장한 인생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인생을 연극이라고 비유했듯 누군가는 인생 연극을 스스로 종결짓기도, 누군가는 종결 당하기도 하면서 퇴장하게 됩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허약한 노인, 겉으로는 건강하게 보이는 고령의 노인에게 닥친 사건도 소개됩니다. 크고 작은 건강 문제들을 누구나 가진 노인이라는 연령이 가해자의 죄를 경감시킬 만한 일일까요. 죽음의 시초가 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피해자는 하루든 열흘이든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살아 있을 텐데도 말입니다.


📚 나이가 들면, 인생사의 습관, 행동과 호불호가 우리 몸 안에서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고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예언한다. - p459


다양한 종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묘한 감정이 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삶은 수많은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모릅니다. <죽음을 해부하는 의사>는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인생의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고, 즐기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고인의 몸에 새겨진 이야기를 읽는 법의학자의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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