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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말들 - 프랑스어가 깨우는 생의 순간과 떨림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23년 9월
평점 :

20년 차 파리지앵 목수정 작가의 신작 <파리에서 만난 말들>. 매일 마주쳤던 사람들, 거리, 사물들로부터 길어 올린 소중한 이야기들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말은 각각의 공동체가 경험과 성찰을 통해 빚어낸 열매다."라고 하며 프랑스 언어 속에는 프랑스의 역동적 역사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들려줍니다.
거친 현실 속에서 유연하게 시대를 건너게 해주는 말,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착취와 갈등의 흔적이 남은 언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지혜가 담긴 언어 등 언어들 속에는 개인의 서사는 물론이고 사회의 뼈대를 이루는 구조적 골격이 있음을 짚어줍니다.
<파리에서 만난 말들>에 소개된 34개 단어는 단지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신적 가치를 일깨울 때 더욱 의미 있습니다.
ㅇ발음이 많아 우아하게 들리는 프랑스어. 달콤한 인생을 조각하는 말들을 소개하는 파트는 읽는 내내 기분이 너그러워지는 느낌입니다.
두우스망~~~ 하면서 깊은 호흡으로 숨을 고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기의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 같은 doucement(두스망)은 속도를 늦출 것을 주문하는 천천히가 담지 못하는 공감각적 뉘앙스가 있습니다. 뛰다 넘어질지언정 지각하지 말아야 하는 한국인 유전자와 달리 "늦으면 그냥 늦는 거야."라며 뛰는 법이 없는 프랑스인 유전자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말하는 사람에게서 한결같이 경이로운 표정을 발견하게 된다는 신기한 단어도 있습니다. 번역가이기도 한 목수정 작가가 가장 번역하기 난감했던 단어로 손꼽은 Épanouissement(에파누이스망). 사전적 의미로는 개화이지만, 미운 오리 새끼가 자라 백조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듯한 궁극의 기쁨에 사로잡힌 사람을 향해 바쳐지는 단어라고 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만개했을 때의 희열을 묘사하는 단어가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그 상태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며 이와 달리 우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왜곡된 개화라는 의미를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소수 지배 계급의 언어, 생존을 구하는 다수의 언어가 혼재하는 프랑스 사회. 열망과 결핍이 담긴 단어도 많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프랑스 역사에서 우리의 3·1운동이나 8·15광복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정교분리법 제정과 관련한 단어 laïcité(라이시테), 해방과 냉소의 두 얼굴을 가진 On s’en fout(옹 상 푸) 등 프랑스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에 담긴 시대의 흔적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파리에 왔던 첫날, 프랑스인이 건넨 첫 번째 말은 Pardon(빠흐동)이었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와 함께 가장 많이 쓰는 말 '실례합니다' 빠흐동에 담긴 뜻풀이가 기대 이상으로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잘못을 대하는 프랑스인의 정서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하면 긴 휴가로 유명한데요. 파업이라는 단어 Greves(그레브)를 통해 여가와 문화생활이 프랑스인들 일상의 핵심 과제로 떠오른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풍요로운 공동체를 견인하는 말 파트에서는 현대사회에서 작동하는 공동체 단어가 소개됩니다. SNS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폭발적으로 사용되는 단어 du coup(뒤 쿠)가 오늘날 프랑스 사회의 어떤 점을 대변하는지도 짚어줍니다.
연대를 뜻하는 solidarité(솔리다리테) 단어가 양지와 음지에서 두루 맹활약한다는 프랑스. 연대라는 이름이 정책에 무척 많이 사용될 만큼 즐겨 사용합니다. 18세기식 개념인 박애가 현대의 단어인 솔리다리테로 바뀌는 게 맞다고 많은 이들이 지적할 정도입니다. 이 단어가 뿜어내는 메시지의 영향력이 크다는 걸 실감하며 연대라는 단어의 힘이 미약한 우리나라 현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프랑스어 속에 깃든 프랑스 문화와 역사를 들여다보며 프랑스 사회의 정서를 엿볼 수 있는 <파리에서 만난 말들>. 그와 동시에 한국어에 깃든 한국 사회의 민낯을 함께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에 담긴 생각의 방식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감각과 깨달음을 주는 의미 있는 에세이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