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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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쉬 페이션트>로 부커상 수상,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오스카상을 휩쓴 데다가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 최고 작품에 수여하는 황금 부커상까지 받은 마이클 온다치. 그의 또 다른 소설 <기억의 빛>을 만나봅니다. 두 소설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결은 확연히 다른 느낌입니다.


원제 Warlight를 기억의 빛으로 번역한 부분이 맘에 쏙 듭니다. 전시에 등화관제로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울 때 길을 밝히기 위해 쓰이는 희미한 빛. 그 희미한 빛을 따라가며 기억을 더듬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945년, 부모님은 범죄자 비슷한 두 남자에게 우리를 맡기고 떠났다."는 첫 문장은 뭔가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론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벌어질듯한 기대감을 안겨줍니다. (다 읽고 나니 그 기대감에 뜻밖의 반전을 주는 게 이 소설의 핵심이었더라고요.) 누나가 열여섯 살,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열네 살일 때의 일입니다.


3층에 세 들어살던 남자와 권투선수 출신의 남자가 남매의 보호자가 됩니다. 남매는 그들에게 나방과 화살이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제법 보호자 역할을 해냅니다. 기숙사를 도망 나오며 방황하던 남매의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화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하실에서 어머니의 트렁크 가방을 발견합니다. 싱가포르로 간다며 열심히 짐을 꾸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한데, 그 가방이 고스란히 지하실에 놓여 있었던 겁니다. 짐도 없이 어머니는 어디로 사라진 거죠? 그리고 연락조차 없는 아버지 역시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 사건은 남매로 하여금 부모와의 세계로부터 떨쳐진 고아가 된 느낌을 안겨줍니다.


나방과 화살은 부모님의 상황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안전하게 있다고만 합니다. 나방과 어머니의 대화를 미루어 짐작해 보면 어머니가 생각보다 훨씬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전쟁이 다 끝난 지금, 이 상황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집에 드나드는 온갖 지인들의 정체도 미심쩍습니다.


그렇게 남매는 나방과 화살,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스며듭니다. '나'는 화살의 조수로 개 밀수 사업을 돕기도 합니다. 은밀하게 템스 강을 누비고 골목들을 누비는 화살과 함께 십 대의 시기를 보냅니다. 물론 로맨스도 하고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남매가 납치를 당할 뻔한 사건이 벌어졌고, 보호자들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 일은 남매의 삶을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어머니는 다시 남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예전과 같은 삶을 살기 힘들어졌습니다.


세월이 흘러 스물여덟이 된 '나'는 정보국 기록보관소에서 일하며 옛 흔적을 따라갑니다. 기록보관소에는 전쟁과 전후 시기를 다룬 서류들이 가득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보복과 보복이 이어지는 시기가 이어졌고, 대중이 알아서는 안 될 작전들의 자료를 폐기하는 작업이 계속됩니다.


이 일이 어머니의 수수께끼를 밝혀낼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하는 '나'는 기록을 살펴보며 집을 드나들던 이들의 정체의 힌트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부모보다 그의 성장에 더 영향을 끼친 그들이 그립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삶도 조금씩 엿보게 됩니다. 여전히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뿌연 흔적들뿐이지만 전쟁 당시 치열하게 활동한 비밀 요원들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비밀스러운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됩니다.


"십 대의 우리는 어리석다. 잘못된 말을 하는가 하면, 겸손하게 처신하는 법도 모르고, 수줍음을 덜 타는 법도 모른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비로소 보이는 것이, 그런 우리에게 주어졌던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배우고 또 성장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게 일어났던 일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 책 속에서


세월이 흘러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완전하지 않은 기억을 더듬으며 기억 속에 숨기고 내버려 둔 감정들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어른 버전용 성장소설입니다. 한편으론 당시엔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새로운 일들을 뒤늦게 깨달으며 독자에게까지 반전의 충격을 안겨줍니다.


전쟁 기간에 활동했던 스파이는 전쟁이 끝난 후 어떤 생활을 하는 걸까...라는 궁금증이 해소되는 느낌은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음지에서 활동한 그들은 저마다의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와의 인연은 철저하게 끊겨버렸습니다. 그 상황이 너무나도 슬프게 다가오더라고요. 아드레날린 치솟는 액션 스파이물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기억의 빛>에 나오는 비밀 요원들은 현실 속 평범한 이웃을 엿보는 기분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페이지를 넘기니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재독이 필요한 소설입니다. 여전히 미스터리하게 남아 있는 부분도 많지만 그래서 warlight라는 제목이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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