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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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문학과 예술의 르네상스를 연 아버지라 불리는 앨러스데어 그레이 작가의 소설 <가여운 것들>. 소설 속 소설 형식을 취하는 독특한 구성이어서 읽는 내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소설인지 독자의 상상력을 마구마구 자극합니다.


올해 공개 예정이라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Poor Thing>의 원작 소설 <가여운 것들>. 엠마 스톤, 윌렘 데포, 마크 러팔로 등 인상 깊은 배우들이 출연한다니 더욱 기대가 큽니다.​​


앨러스데어 그레이 작가는 이 소설에서 편집자 역할을 자처합니다.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으로 풍덩 뛰어든 겁니다. 그래서 더 현실감 있답니다. 우연히 빅토리아 시대 맥캔들리스 박사의 저작물을 창고에서 발견됐는데 그 내용이 기막히게 놀랍습니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사실인지 의심이 들었지만 나름 조사해 보니 믿을만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제 우리는 맥캔들리스 박사의 시점으로 빠져들 시간입니다. 『스코틀랜드 공중보건 담당관 아치볼드 맥캔들리스 박사의 젊은 시절 일화들』이란 제목으로 쓴 글은 맥캔들리스가 스코틀랜드의 도시 글래스고에서 의대생 시절부터 한 여자를 만나 결혼에 이르는 시기까지를 다룹니다.​​


글래스고 의대생인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궁핍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남겨준 돈으로 간신히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반듯한 옷차림에 신경 쓸 여력조차 없습니다. 가난이 발목을 붙잡는 느낌입니다. 빈약한 교우 관계 속에서 그나마 있는 친구 백스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백스터는 유명한 외과의의 사생아로 태어나 현재 부유한 상속인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커다랗고 위협적인 몸을 가진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존재를 모른 채 자라난 탓에 결핍을 안고 살아갑니다.​​


백스터의 유일한 낙은 넓은 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술을 개선시키는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연구가 놀랍습니다. 외과적으로 조립된 인간을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성공합니다. 강에 투신해 사망한 임산부의 육체에 뱃속 태아의 두뇌를 결합해, 20대 여성이지만 정신 연령은 아기인 여성 벨라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탄생한 벨라는 백스터의 교육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갑니다. 그런 벨라를 마주하게 된 '나'는 단숨에 벨라의 매력에 빠져듭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꿈속 여인과도 같은 벨라에게 결국 청혼을 하기에 이르는데...​​


그런데 벨라의 연애관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너무나도 프리~합니다. 백스터가 '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금 얘가 다른 남자와 눈 맞아 도망갈 준비한다며 당장 오라고 난리입니다. 결국 '나'와 약혼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버린 벨라. 그런데 소설 초반에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라고 했으니 분명 해피엔딩일 거란 말입니다. 네. 벨라는 결국 돌아옵니다. 문제는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과정도 골 때린다는 겁니다. 벨라가 워낙 호색한이라 남자가 감당 못해서 도망갔... 이쯤 되면 이건 코미디 소설인가요? 근데 너무나도 진지하게 스토리텔링이 이어지니 웃을 타이밍을 자꾸 놓칩니다.​​





'나'에게 다시 돌아오기까지 벨라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교육, 역사, 실업, 자유, 정부... 등 많은 것들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합니다. 떠날 땐 어린아이였는데 돌아올 즈음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어 옵니다. 처음엔 기생하는 사람으로만 살았다가 이제는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벨라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이후에도 순탄치 않습니다. 벨라의 진짜 남편이라는 사람이 등장한 겁니다. 지금의 벨라가 아닌 강에 투신한 여성 말입니다. 당시 투신할 정도로 절박했던 그녀의 남편이라면 앞으로의 일이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독자가 벨라의 탄생에 얽힌 의문 따위는 생각도 못 하게 자꾸 사건이 몰아칩니다.​​


한편 맥캔들리스의 저작물과 함께 발견된 편지가 있었습니다. 벨라가 후손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벨라는 이후 빅토리아라는 이름으로 그 역시 의사가 되어 살아갑니다. 맥캔들리스가 죽은 후에야 그 책을 읽고는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싶었지만 "그 가엾은 바보가 존재했다는 것의 유일한 증거가 아니겠니."하며 남겨두기로 합니다.


대신 조목조목 남편의 글을 반박하는 편지를 남깁니다. 이제는 빅토리아의 시점으로 빠져들 시간입니다. 빅토리아는 백스터의 외모, 아내의 실체에 대해 맥캔들리스의 이야기 대부분이 허구란 것을 지적합니다.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다 보니 허구도 실제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고 말이죠. 아내의 입장에서 맥캔들리스는 "그는 나 외의 다른 사람들에겐 그리 쓸모가 많지 않았다."라고 할 정도로 무능력한 인간이었음을 이야기하면서 백스터, 맥캔들리스, 빅토리아의 관계를 재정립해나갑니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요? 작가는 편집자의 역할을 또다시 발휘합니다. 맥캔들리스와 빅토리아의 글을 모두 실은 다음 조목조목 역사적 사실을 증거로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번 독자는 속아넘어가게 되지요. 주석조차 일부는 허구거든요. 이런 깨알재미들이 가득한 <가여운 것들>입니다.


읽는 내내 불편한 요소가 곳곳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관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말이죠. 버지니아 울프는 빅토리아 시대의 유령과도 같은 여성성을 죽인 후에야 글을 쓸 수 있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당시 여성에 대한 생각은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작가는 이 부분을 벨라를 통해 신랄하게 비꼽니다. 당연스럽게 정부를 둔 남성들을 상대로 한낱 파트너로 전락시켜버리는 벨라의 행동으로요. 빅토리아 시대의 성 도덕률을 전복시키는 벨라입니다. 가여운 것들!


그저 따뜻한 포옹을 원하는 벨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들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아내를 노동하는 남자가 집에서 부리는 노예와 같은 도구로 취급하는 빅토리아 시대 사고방식을 꼬집습니다. ​​


<가여운 것들>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트모던적 재해석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메리 셸리의 가족사가 슬쩍 들어있기도 하고, 프랑켄슈타인 소설처럼 진행하는 구조는 물론이고 허세 섞인 말투까지 모든 것이 흥미진진합니다. 엽기적이기까지 한 삽화도 예술입니다.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안겨줄 소설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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