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독
이기원 지음 / 페퍼민트오리지널 / 2023년 2월
평점 :
절판




국가 시스템이 사라지고 막강한 대기업이 회사를 경영하듯 도시를 관리하게 된 22세기 서울의 기묘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디스토피아 소설 <쥐독>. 영화 <악마를 보았다>, <신세계>, <낙원의 밤>, <마녀> 등을 제작한 페퍼민트앤컴퍼니의 글로벌 슈퍼 IP로 기획된 페퍼민트오리지널의 SF판타지 소설입니다.


소설의 등장인물과 딱 어울릴 만한 배우를 매치해 보는 즐거운 상상 속에서 다채로운 인물들의 서사가 술술 읽히는 그야말로 페이지터너 소설입니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개인적으로는 OTT에서 시리즈로 길게 뽑아내주면) 딱 내 취향이라고 외칠만한 <쥐독>입니다.​​


이기원 작가의 흡인력 있는 맛깔스러운 문체에 반했습니다. <쥐독>은 그의 첫 소설이지만 현직 시나리오 작가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재미와 의미 모두를 잘 잡아내고 있습니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윤재호 작가의 표지 일러스트도 긴장감을 더합니다. 쥐독에 빠진 서울의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소설의 배경을 소개하는 서울 연대기와 프롤로그에서부터 멋짐 폭발합니다. 22세기 미래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를 거치는지 한 번쯤 상상해 봄직한 이야기들이 압축되어 있어 기대감을 자아냅니다. 세계 인구의 75퍼센트가 사망한 신종 바이러스 출현,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오랜 전쟁과 감염병으로 국가 시스템이 붕괴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도시는 대한민국 서울입니다.


강력한 자본과 첨단 기술력을 갖춘 한국의 대기업은 국가 시스템이 무너져도 버텨냈고, 10대 기업 회장단 모임 전국기업인연합(전기련)이 결국 도시 경영권을 인수합니다. 그렇게 뉴소울 시티(New Soul City)가 출범합니다.​​ 처음에는 태평성대의 시절이지만 바야흐로 전기련의 철권통치시대가 펼쳐집니다. 상류층과 일반 시민 그리고 낙오자들의 경계는 점점 심해지고, 결국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사는 3구역은 쥐독이라 불립니다.


퍼주기만 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기업의 생존법칙이 고스란히 도시 경영에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들의 방식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기업을 위한 노동력을 제공한 시민들만 기업의 고객으로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게 합니다. 전기련에 불만 있는 시민은 일명 블랙컨슈머가 됩니다.


뉴소울 시티의 화폐부터 철저한 생존법칙이 적용됩니다. 노동력을 제공한 시간에 따라 주어지는 화폐를 일컫는 분각을 벌기 위해 근로자들은 초과근무가 필수이고 그러다 보니 싸구려 각성제를 복용하는 일은 기본입니다.​​ 2구역에 살던 민준은 각성제를 때려부으며 일하지만 간신히 제일 싼 밀키트만 구할 형편입니다. 의욕 없고 우유부단한 하루하루입니다. 그러다 공장에서 1구역 최상위 시민들을 위한 최상품 각성제 루왁으로 인해 사건은 시작합니다. 한 알 만으로도 일 년 치 맨션 관리비에 해당하는 루왁을 무려 1,500여 개를 들고 튄 겁니다.





이내 클래식 음악을 튼 고객서비스팀이 출동해 애프터서비스를 합니다. 그들은 총을 들었습니다. 살벌한 애프터서비스입니다. 기업의 용어로 대체된 사회를 풍자하는 용어가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민준이 도망친 곳은 3구역 쥐독입니다. 쥐독에서도 목숨을 담보로 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뒤늦게 후회해 봤자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생존을 위한 본능만으로 움직입니다.​​


상류층과 낙오자들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자리 잡은 뉴소울 시티. 도시의 신이라 불리는 수장 류신은 100년 넘게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육체를 바꿀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이후 청년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상위 2퍼센트 상류층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민들은 그저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일 뿐입니다. 시민들의 자유 의식이 깨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전기련의 계획은 치밀합니다. 디지털 분서갱유를 실시해 지식에 관련된 모든 매개체를 없앴고, 시민들은 점점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동안 내버려 뒀던 쥐독에도 압박을 가합니다. 류신의 입장에서 쥐독은 허기와 탐욕에 미쳐버린 짐승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잡아먹으려는 쥐로 가득 찬 쥐독입니다. 이제는 뉴소울 시티의 고객들을 위협하는 더러운 쥐새끼들을 단호히 응징할 차례입니다. 섬뜩할 만큼 놀라운 계획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바로 쥐독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습니다. 독에 갇힌 채 굶주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하는 쥐가 한 마리만 남았을 때 풀어주면 이미 쥐맛에 길들여진 그 쥐는 계속 동족 살해를 하게 되는 쥐독 이야기. 류신은 이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서 펼쳐나갈까요.


"최고의 각성제는 탐욕이 내뿜는 아드레날린이다." - 책 속에서


민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지만 악인이든 영웅이든 저마다의 매력을 가진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강렬합니다. 누구 하나 버릴 캐릭터가 없습니다. 신체를 자유로이 갈아탈 수 있는 대기업 자제들이 죽음을 한낱 놀이로 즐기며 다이빙 파티를 하는 장면은 영상으로 재현될 때 특히나 파격적인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담은 22세기 바벨탑 뉴소울 시티. 도시의 신이 된 류신에 대응하는 이들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진실을 보지 못하게 시민들의 눈에 씌워져 있던 가리개를 치울 수 있을까요. 쥐독에서 벗어나 연대의 힘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큰 그림이 조금씩 선명해질 즈음까지 결말을 향해 갈수록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멋진 소설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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