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지음, 윤진 옮김 / 엘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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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작가 역대 최초 수상이라는 타이틀을 안긴 2021 공쿠르상 수상작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90년생 MZ세대 작가이자, 세네갈 출생으로 프랑스 문단에서 활동하는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Mohamed Mbougar Sarr)의 장편소설입니다. 


초판 한정 친필 사인 인쇄본에 작가의 메시지 카드를 만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읽게 되는 메시지이지만,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읽게 될 겁니다. 소설에 담긴 주제가 꽤 방대해서 망망대해 한가운데 솟아난 한 평의 섬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그제야 정리되는 기분입니다. 


천재로 추앙되었다가 사라진 미스터리한 작가의 자취를 따라가는 젊은 작가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는 간단한 줄기 안에 추리, 사건 조사 기록, 가족 연대기, 로맨스, 교양, 철학, 정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문학에 끌려 작가의 꿈을 키워온 디에간. 청소년 시절 이름을 알게 된 T.C. 엘리만이라는 작가가 궁금해 더 알고 싶었지만, 그가 남긴 단 한 권의 소설은 만날 수 없습니다. 1938년 출간된 그의 작품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는 표절 논쟁으로 전량 회수되었고, 재고는 폐기되었습니다. 파리에 온 디에간은 유명한 세네갈 작가 시가를 만나게 되고, 첫 만남은 엉뚱했지만 우연이 운명으로 작용합니다. 찾을 수 없었던 엘리만의 책이 시가에게 있었고, 디에간이 빌려 읽게 됩니다. 


신화처럼 여겼던 엘리만의 책을 읽은 그날 밤, 몇 번을 다시 읽고 다음날에도 읽습니다. 너무나도 압도적인 책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뭔가를 말할 수 없는 심정처럼 위대한 작품을 읽고 나니 벌거벗겨진 기분이 듭니다. 시가는 디에간에 그 책을 빌려주면서 분명 충고를 했습니다. "네 인간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게 될 거야."라고 말이죠.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은 디에간의 첫 책 『공허의 허무』로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문학의 유망주"라는 칭송을 받았음에도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지 보여줍니다. 특히 같은 세네갈 출신 시가는 뼈 때리는 말을 스스럼없이 합니다. 야심차고 결정적인 위대한 소설을 꿈꾸며 삶의 매 순간을 글쓰기의 순간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작가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는 디에간에게 제대로 한 방 먹입니다. 


문학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 듯 굴 수밖에 없는 작가의 세계. 문학적 관념 자체를 부정하는 책을 쓰면서도 글을 쓰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작가들을 일컬어 '문학적 요실금'이라는 질병으로 표현한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엘리만의 소설을 읽은 디에간은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경험하는 마음을 내비치기도 해서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기도 합니다. 애정 하는 작가를 발견한 독자라면 첫 책에 담겼던 아름다움을 이후의 책에서도 발견하길 기대하잖아요. 적어도 그 흔적만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때 독자가 겪는 상실감을 디에간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파리의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문단에서 관심의 대상이란 어떤 의미인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계 작가가 프랑스 문단에 들어섰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집니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은 디에간의 시점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시점을 오가며 흑인 랭보로 칭송받다 표절이라는 비판이 나왔을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사라진 미스터리한 작가 엘리만을 찾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디에간 외에도 이미 많은 이들이 엘리만을 찾아 나섰지만, 침묵한 인간 엘리만을 찾아 나섰을 뿐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알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 작가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한 작품에 대해 진정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명제 아래서 엘리만이라는 작가와 『비인간적인 것의 미로』의 이야기를 파헤쳐 들어가는 디에간.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한 인간의 스토리는 평면적일 수가 없습니다. 엘리만의 이야기를 떡밥처럼 조금씩 던지면서도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미스터리를 묵직하게 유지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결코 떨쳐낼 수 없다. 영원히 그 이야기에 묶여 있다. 원하지 않는 아기를 한밤중에 내다 버리듯이 그렇게 버릴 수 없다. 우리는 그 이야기와 싸운다. 계속 싸운다. 싸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싸우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쉼 없이 가리키고 이름 붙이는 것뿐이다. 그 이야기가 우리를 끌고 가려고 가면을 쓰고 다가오면 그 가면을 벗겨내야 한다." - 책 속에서


화자가 주거니 받거니 연결되는 부분이 많은데 깜박 놓치면 화자를 짐작할 수 없어 읽을 때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 흐름을 잘 이어가세요~ 작가뿐만 아니라 비평가, 독자 등 문학이라는 거대한 세계에 발을 들인 이들 모두에게 불편한 말을 던졌음에도 은연중에 공감했던 것들이라 오히려 시원한 느낌도 받을 수 있어요. 


아프리카계 작가에게 독자가 기대하는 것과 아프리카계 작가 본인이 고민하는 보편성 사이의 상흔이 가득한 소설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프랑스 문학계를 비판한 이 소설에 공쿠르상이라는 영예를 안긴 프랑스 문학계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신비주의, 식민지, 홀로코스트, 디아스포라 등 현대사를 살아낸 인물의 생애에 걸친 거대한 이야기를 마주하고 나면 먹먹해지는 감정을 받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소설 속 엘리만의 사건이 실제 일어났던 일을 모티브 삼았다는 데 있습니다. 번역자의 해설까지 읽고 나면 이 소설의 참맛을 더 진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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