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김병종 지음 / 너와숲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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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그림이 밥, 글이 반찬이었던 김병종 화가. 대영 박물관, 로열 온타리오 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유명 화백이자, <화첩기행> 시리즈 등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남원시립 김병종 미술관에서 그의 초기작 <바보 예수>부터 근작 <풍류>에 이르기까지 대표 작품들을 언제든 감상할 수 있다니 언젠가 가봐야겠습니다. 


김병종 여행 산문집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에서는 첫사랑처럼 차곡히 보관되어 있는 기억 창고를 열었습니다. 풍경과 사람이 함께했던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드는 순간 여행은 새로 시작됩니다. 김병종 화백의 다채로운 매력이 담긴 그림이 담백한 글과 어우러져 예술 화보집을 보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는 예쁜 책입니다. 


표제작이 된 죽어도 좋을 만큼 좋았던 그곳은 어딜까요. 옥색과 청회색과 은색, 그 위에 보석 가루를 뿌린듯한 바다, 에게해입니다. '여기서라면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칠 만큼 황홀한 물빛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했습니다. 김병종 교수는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죽음을 떠올립니다. 사는 일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라면 죽음 또한 저토록 아름다운 물빛 속에 마지막 육신이 뉘어질 수는 없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모태의 양수 속에서 나온 생명체는 왜 물이 아닌 습기 찬 땅속에 묻혀야 하는 걸까 하는 단상이 이어집니다. 


에게해의 물빛을 떠올리다 보면 늘 죽음이 함께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냥 죽음이 아닌, '화사한 죽음'을요.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은 그가 쓴 평생의 저작물로 가득한 서재에서였습니다. 병실 침대가 아닌 서재에서 삶을 마감한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에 담긴 의미도 곱씹어 봅니다. 그와 함께 김병종 화백의 물빛 바다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봅니다. 


눈부신 에게해처럼 감탄사를 불러일으키는 압도적인 풍경들을 기억 창고에서 하나씩 꺼냅니다. 사하라의 별들, 백설애애한 안데스... 그때 만나는 황홀한 떨림을 찾아 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뜻밖의 추천 명소를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튀니지 옛 로마시대 경기장 엘 젬에서는 폐허의 아름다움을 전달합니다. 숙소도 종종 등장하는데 다시 걸어야만 하는 여행자에게 숙소는 지친 다리뿐 아니라 영혼까지 눕힐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뒷골목 호텔 코르소281은 격이 다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영국 글라스미어에 있는 오래된 호텔 스완호텔은 천국의 입구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어서 신혼여행지로 추천하기도 합니다. 


"나의 여행은 기억의 스크린을 갈아 끼우는 일이기도 하다. 아프고 우중충한 기억들을 밝고 환한 기억들로 바꾸는 것이다." - 책 속에서





사는 게 권태로울 땐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발하는 룩소르행 완행열차를 타보라고 합니다. 조바심 내는 마음이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는 여행입니다.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볼륨이 웬만한 거대국 몇 개를 합쳐도 부족한 몰타를 예찬하기도 합니다. 더블린의 청량한 대기 속 묵직한 인문적 공기도 만끽해 봅니다. 여행을 하며 자신도 몰랐던 취향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미술관 순례 못지않게 정원 순례를 하더라는 겁니다. 모로코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은 생명의 속삭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받은 영감으로 그린 몇 점의 그림도 있을 만큼 여행에서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문학청년 시절부터 꿈꿔온 라틴아메리카 여행의 추억도 꺼내듭니다. 우울한 날이면 남미로 가자는 그의 말처럼 라틴과 관련한 그림은 현란한 색채의 장입니다. 김병종 화백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붉은 꽃 이미지가 라틴의 열정과 멋지게 어우러집니다. 서양화와 동양화 분위기를 두루 오가는 김병종 화백의 작품들을 감상하며 눈호강 제대로 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그 황홀한 풍경들은 눈앞에 잔상으로 남아 간단 없이 떠오른다. 그 떠오르는 풍경들을 화폭에 담아내는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내 마음의 여행은 다시 시작되는 셈이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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