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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 - 지하철 앤솔로지
전건우 외 지음 / 들녘 / 2022년 7월
평점 :
지하철을 이용하는 각인각색 사람들. 스쳐지나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출근할 때면 지정 자리가 있는 듯 같은 시간에 마주하는 이도 있습니다. 땅 밑으로 다니는 지하철을 타면 바깥 풍경을 구경할 것도 없고 시선 처리가 애매할 때가 많지요.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관찰 모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지금 어디를 가고 있을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상상을 펼칩니다.
그런 상상을 맛깔나게 보여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는 매일 수많은 삶을 싣고 나르는 지하철 속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7편의 소설을 담은 지하철 앤솔로지입니다. 단편으로든 장편으로든 제가 이미 읽어본 작품들의 작가님들이라 스타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다들 꽤 즐거운 변주를 펼친 느낌입니다. 장편소설에서는 만나기 힘든 한국형 코스믹을 가미한 공포, 미스터리, 스릴러, 무협,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를 담은 단편소설집입니다.
정통 공포물로 스릴감을 안겨주던 전건우 작가는 이번 <호소풍생> 편에서 개연성 날려버린 엉뚱미를 선사합니다. 약자를 돕고 정의를 실현하며 나라를 지키는 자칭 협객의 도를 지키며 사는 일흔다섯 살 편 관장. 지하철에서 묻지마 폭행 이슈를 떠올리게 하는 에피소드가 숨어있습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편 관장이 어떻게 불의에 대처하는지, 여행의 설렘을 가진 여행자들이 많은 공항철도를 배경으로 보여줍니다.
쾌적한 노선이 있는가 하면, 악명 높은 노선도 있습니다. 출퇴근 지옥철로 유명한 2호선이 빠질 수 없습니다. 좀비처럼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탄생한 정명섭 작가의 <지옥철>은 실체 없는 공포가 더해질 때 인간이 얼마큼 지배당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는 소설입니다. 정명섭 작가는 또 다른 단편 <쇠의 길>에서 깜깜한 터널 속 지하철 선로 저 너머가 궁금한 이들의 상상을 건드리기도 합니다.
버뮤다 응암지대라고 불릴 정도로 탈출하기 힘들어 미아가 되기 쉬운 6호선도 있습니다. 매번 같은 시간 같은 칸에 타면서 소설의 첫 문장을 생각해 내는 주인공이 지하철에서 만난 이와 연애를 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조영주 작가의 <버뮤다 응암지대의 사랑>. 버뮤다 응암지대에서 반대 방향 타는 걸 설명하려면 복잡하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형성된 공감대가 이렇게 로맨스로 이어지는 부분이 재미납니다.
서울 어디를 다녀오든 사당역에서 집으로 오는 광역버스 타는 루트를 이용하는 저에게도 익숙한 4호선 이야기는 신원섭 작가의 <4호선의 여왕>으로 만나봅니다. 지하철 에피소드 하면 물품보관함과 관련한 범죄가 쉽게 떠오르지만, 이 소설에서 물품보관함은 그저 거들 뿐.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는 생각으로 읽게 되는 액션 첩보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튜버의 공포 체험은 폐쇄된 지하철역에서도 일어날 법합니다. 막차 시간에 그곳에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면 다른 차원으로 간다는 제보를 받은 유튜버의 체험기를 담은 김선민 작가의 <농담의 세계>. 괴담처럼 가짜뉴스로 나올 만한 뜻밖의 결말에 깜짝 놀랄 겁니다.
지하철 사고를 타임리프와 연결한 단편 <인생, 리셋>은 정해연 작가의 전작들처럼 인간 본성을 뼛속 깊이 파헤치며 공포에 가까운 스릴감을 안겨줍니다.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과거의 선택을 바꾼다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한 마음이 반영된 타임리프 소재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이면서도 결코 똑같지 않은 하루. 그 안에서 루틴처럼 반복되는 사소한 것에 눈길을 던진 지하철 앤솔로지 <밀지 마세요, 사람 탑니다>. 읽고 나니 그제서야 제목의 '사람'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계속 맴돕니다. 이제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이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차지하면서 혼자서 섬뜩해하거나 피식거릴 것만 같아요. 장르적 정통성에서 슬쩍 비껴간 단편들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