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배명훈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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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SF 소설 읽으면서 빵빵 터졌어요. 살짝 정신이 사나웠던 날이라 가볍게 읽어보려고 집어 든 책이었는데 굿초이스~! 배명훈 SF 작가의 소설은 앤솔로지 단편으로만 접했던 터라 장편소설이 궁금하긴 했습니다. 제목만으로는 감이 오지 않는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을 만족스럽게 읽었는지라 다른 장편도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이번 소설은 배명훈 작가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합니다.


타고난 금수저 초록이. 딱히 꿈도 없고 그냥저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직장인입니다. 반면 재능도 있고 통찰력도 있는 친구 구름이는 사비예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희망도 있지만, 정작 그 꿈을 실행하기 위한 돈이 없습니다. 우주로 나가야 하거든요.


별 관심도 없으면서 좋은 건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이거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과감함까지 장착한 초록이는 꿈을 가진 구름이를 부러워한 나머지 친구의 꿈을 훔치기로 합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구름이가 말했던 사비예대로 가기 위해 사비행 우주선에 올라타는 재빠른 행보를 보여줍니다.


초록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화성 개척은 물론이고 곳곳에 우주도시가 세워진 시대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인 부여의 옛 이름을 딴 사비는 화성 쪽에 떠 있는 스페이스 콜로니입니다. 그렇게 사비에 도착한 초록이는 다음날 바로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됩니다. 사비예대가 사비에 있지 않고 다른 우주도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거든요. 다행히 화성 역술계를 평정하고 사비에서 점집을 하고 있는 고모가 길을 열어줍니다.


"암, 첫 직장은 사서 다니는 게 좋지. 아무 데나 시험 봐서 들어가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금수저 집안답게 초록이는 관직을 사서 시청 주소국장 자리에 앉습니다. 주소 체계가 엉망인 사비의 주소를 관리하는 일이지만 공무원들 대부분이 놀자판입니다. 초록이 역시 스페이스 탐관오리를 자처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닥에 과녁 표적처럼 생긴 동심원이 그려졌다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된다는 걸 발견하는 초록이. 주변엔 총알 자국 같은 게 있습니다. 그즈음 오래된 킬러의 전설을 떠올립니다. 과녁을 맞히진 못했지만 점점 과녁 중앙에 가깝게 맞춰나가고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문제는 사비의 물리학은 로컬 룰을 따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지구의 물리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원통 모양의 도시 형태인 사비는 인공 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2분에 한 바퀴씩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1초만 돼도 3도가 움직이는 겁니다. 당연히 총알도 휘어져서 날아가게 됩니다. 여기선 스나이퍼가 기를 펴지 못하는 곳입니다.


이쯤 되니 영화 <원티드>의 명장면이 생각납니다. 가히 예술 작품과도 같았던 곡선으로 휘어져 날아가는 총알 장면 말입니다. 도대체 사비에서는 누가 이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있는 걸까요. 전설의 킬러가 맞다면 그가 처리할 표적은 과연 누구일까요. 사비는 다섯 파벌이 서로를 향해 아가리를 벌리며 대립했다가 간신히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스나이퍼의 암살 대상이 대통합을 이루는 일인자를 향한다면 사비의 평화도 깨지는 게 아닐까요.


이제 스나이퍼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사비의 인공 중력에 맞춰 시험 사격을 해온 의문의 스나이퍼. 인간이 사비의 탄도학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정복한다면 암살에 성공한다는 의미일 텐데 지켜보는 이로서는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물론 이 마음은 초록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탁월하게 빛나는 존재로 스나이퍼를 바라보는 초록이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배명훈 표 SF 소설의 진가를 맛볼 수 있었던 시간입니다. 문학은 유쾌함을 선호하는 예술 장르가 아닌 데다가 고통, 고독, 고뇌에 더 큰 박수를 보내는 장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학은 유쾌해도 좋다는 믿음을 안겨준 터키 작가 아지즈 네신의 영향을 받은 배명훈 작가는 무거움과 경쾌함의 경계를 잘 타고 놀 줄 아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보는 이는 몹시 부끄러우나 당사자는 한 점 부끄럼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척척 막말을 가장한 진실을 내뱉는 독특한 캐릭터들, SF 특유의 찬란한 기술보다는 이미 현실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부분이 오히려 요즘 SF 소설의 멋 아니겠어요.


책장을 덮고 나서도 갑자기 등장인물들의 막말들이 생각나 피식거리게 만들지를 않나, 감동을 안겨줄 때도 억지스럽지 않게 슬쩍 깔아놓아 잔잔한 여운이 남는 딱 그 정도의 감정선을 유지해 주니 그야말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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