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를 지워줘 ㅣ 도넛문고 1
이담 지음 / 다른 / 2022년 3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414/pimg_7960121633379466.jpg)
2019년 N번방 사건으로 디지털 성범죄가 얼마나 악질적인 형태로 성행하는지 드러나게 되었지만, 경악스러운 이슈 정도로만 생각하고 피해자의 이야기를 잊어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메타버스에서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성착취에 관한 기사가 나올 정도로 기술 발달에 따른 디지털 범죄는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시대를 통과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도넛문고 시리즈 첫 번째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주제를 다룬 이담 작가의 <나를 지워줘>. 청소년들의 시선으로 접하는 디지털 성범죄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디지털 장의사 모리는 불법 촬영물을 지워주는 일을 합니다. 어린 시절 실종된 여동생을 닮은 여자아이의 디지털 흔적을 따라가다 우연히 불법 촬영물 유포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친동생 같은 생각에 인터넷에 유포된 사진을 없애 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언젠가는 동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디지털 장의사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열여덟 살 미성년자인 모리가 이 일을 하려면 불법을 저질러야 했고, 재유포 누명을 받아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그만두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로 방송에 나오며 핫한 유명 인사가 된 리온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교묘하게 영상을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이 유포된 겁니다. 모리네 반 남자아이들만 모인 단톡방에도 딥페이크 영상이 올라온 상황에 이르자, 결국 리온은 자살 기도를 하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집니다. 도움을 요청받았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죄책감이 든 모리는 가해자를 찾아 나섭니다. 리온의 찐친이라 여긴 재이는 생각과는 달리 싸늘하기만 합니다. 수상하게 여긴 모리는 재이의 SNS를 해킹해 비밀글을 살펴보는데, 그곳에는 리온을 향한 분노가 가득한 글은 물론이고 딥페이크로 만든 영상의 원본으로 사용된 것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재이를 가해자로 판단합니다.
<나를 지워줘>에서는 피해자 리온이 왜 엄마에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숨기고 모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가해자 재이의 서사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가정 형편이 어떻고 스트레스가 어떻고 하는 식의 가해자가 스스럼없이 내뱉는 변명이 클리셰처럼 쏟아집니다. 하지만 모리는 단호합니다. 그 어떤 이유도 유포할 권리의 정당성이 되지 못하니까요.
소설에서는 메신저로 불법 영상물을 공유하며 거리낌 없이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굳이 그 상황을 지적하지 않는 방관자의 입장인 이들도 등장합니다. 피해자로서는 죽고 싶다는 말이 그저 한탄하듯 내뱉는 말이 아니라는 걸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자신의 사진을 봤거나 유포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나를 지워줘>는 다양한 복합적인 요소를 덧붙여 가해자였다가 피해자로 전락하기도,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현실적으로 복잡한 이해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 쉬쉬하기 일쑤고, 미성년자 피해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쉽게 공감하다가도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그럴만하다는 이유로 정당성을 부여하며 가해자를 용서하는 제3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짚어줍니다. 디지털 장의사가 불법 영상물을 재유포한 사건처럼 잊힐 권리를 요구하는 이들을 오히려 상처 입히는 것처럼 디지털 범죄는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인 모리가 과연 이번 일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지 결말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모리도 주변 사람이 피해자가 되자 당황스럽고 복잡한 심경이었습니다. 내 딸이, 내 조카가, 내 여동생이 피해자가 된다면 흥미로운 뉴스 보듯 할 수 있을까요. 소설보다 더 잔인한 현실을 살아가는 피해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청소년들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디지털 성범죄의 다양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나를 지워줘>. 청소년부터 어른까지 함께 읽어야 할 소설입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414/pimg_796012163337946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