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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설은아 지음 / 수오서재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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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웹아트 1세대 작가로 2004년 한국 최초 칸 국제광고제의 사이버 부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설은아 작가의 첫 책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소외된 소통을 주제로 2018년 12월부터 2021년까지 전시한 여정을 엮었습니다. 6평의 작은 공간에서 시작한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전시. "누군가의 부재중 통화를 받아보세요."라는 글이 적힌 아날로그 다이얼 전화기. 수화기를 들면 누군가의 짧고 긴 고백이 들립니다. 그 옆에 자리한 공중전화 부스에는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는 당신의 '하지 못한 말'을 하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곳에 남겨진 목소리는 다이얼 전화기로 랜덤하게 전달됩니다.
전시 기간 동안 차마 하지 못한 말들, 감춰왔던 이야기를 들려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겨진 약 10만 통의 이야기가 모였습니다. 오늘 일을 들려주는 직장인도 있고,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힘든 청년, 고민이 많은 학생 등 다양한 남녀노소의 목소리가 모였습니다.
설은아 작가는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부정적 에너지에 초점 맞췄습니다. 자신만의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타인은 모르는 자신의 아픔을 터놓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적당히 보여주고픈 삶을 편집해 올리고, 감정을 감추는 일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보지 못할 우연히 스치는 여행자와 더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이 전시가 탄생했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고마움은 물론이고 서러움이 가득한 목소리들. 지금도 억지로 산다고, 다음 생에는 안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게 더 쉬워졌다며 고백하는 이도 있습니다. 힘들게 달려온 과거가 허망하다는 사회초년생도 있습니다. 경력 단절의 여성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목소리도 있고, 우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이도 있습니다. 쇼킹한 고백도 있습니다. 쓴소리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증오하는 말을 쏟아내면서도 미안하고 사랑하는 복잡 미묘한 관계를 서글프게 뱉어낸 이도 있습니다. 자괴감에 빠진 이야기에는 함께 가슴 아파하게 됩니다. 시시콜콜한 일상이지만 영감을 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더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소통이 난무하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지만 '좋아요'가 아닌 진정한 소통에 점점 소외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소외된 이들의 소통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설은아 작가의 소망이 빚어낸 결과는 뜻밖의 감동을 안겨줍니다. 작가도 마음의 감기를 심하게 앓고 그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무기력함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전시였습니다. 쑥스러워 하지 못한 말, 아픈 상처, 용기가 없어 전하지 못한 말들을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부정적 에너지를 회피하지 않고, 내 감정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말고, 나의 감정과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합니다.
2018년에 모인 목소리는 지리적 세상의 끝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의 바람 속에 자유로이 놓아졌습니다. 걷다가 왠지 이 공간에 내 이야기가 놓아지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멈춰 목소리들을 풀어줬다고 합니다. 37시간 동안 세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했던 세상의 끝. 5박 6일간의 여정은 단편 필름으로 기록되어 전시장에서 상영된다고 합니다. 이후 모인 통화들은 사하라 사막의 고요 속에 흩어질 거라고 합니다.
전시 기간 동안 모인 목소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사랑, 행복, 엄마, 사람, 미안, 아빠, 힘듦, 생각, 친구, 고마움 등의 단어였고, 생각한 것처럼 긍정적 감정보다 부정적 감정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가슴속에 묻어둔 것들을 풀어낸 그들은 아마 조금은 후련해졌을 것 같습니다.
침묵 후 그대로 통화 종료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내 안에도 끝끝내 삼킨 이야기들이 가득하진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우리 안의 부재중 통화들을 꺼내게 만든 이 전시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언제든 전화번호 1522-2290으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에 접속할 수 있습니다. 요즘 당신의 마음은 어떤가요? 잠시 멈추고 내 안의 부재중 통화를 꺼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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