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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여행자 - 그는 왜 미친 듯이 세상을 돌아다녔는가?
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2월
평점 :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자들이 기억을 잃은 채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고, 최면을 걸자 그동안의 여정을 기억해 내는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주변 국가의 일부에서만 약 22년간 번성하고 사라집니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 저자는 과학실재론의 대표자로 다중인격을 주제로 한 첫 책 <영혼을 다시 쓰다>에 이어 두 번째 책 <미치광이 여행자 (원제 Mad Travelers)>에서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나타났다 사라진 특이한 정신질환인 둔주 유행병을 통해 기묘한 광기의 탄생과 몰락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둔주 유행병. 예기치 않은 기이한 짧은 여행이 간혹 몽롱한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둔주라는 용어는 이미 있었지만, 1887년 티씨에의 박사논문 <미치광이 여행자> 발표를 통해 진단 가능한 특정 유형의 광기로 알려지게 됩니다.
티씨에의 환자 알베르 다다는 최초의 둔주 환자로 기록됩니다. 1866년 프랑스 보르도의 정신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가스정비공 알베르. 첫 번째 둔주는 형이 찾아냈는데 떠돌이 우산 장수를 거들고 있던 알베르는 왜 자기가 거기에 있는지 놀라워했다고 합니다. 이후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정신차리고 보니 파리행 표를 들고 기차 안에 있다거나 돈 한 푼 없이 거리를 헤매고 있거나, 때로는 감옥에 들어가 있기도 했습니다. 우연히 어느 장소의 이름을 들으면, 홀린 듯이 그쪽으로 간 겁니다. 모스크바에서 체포되기도, 터키 국경까지 강제이송되기도 하는 등 위험천만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알베르 사례만 있었다면 유행병이 될 수 없었겠죠. 독립된 질환명으로 성행할 정도로 프랑스에서 심심찮게 이런 일들이 생깁니다. 보르도, 파리를 비롯해 프랑스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고 이탈리아 북부에서도, 10년 후 독일이 그 유행을 이어 받았고 러시아도 따라갑니다. 그런데 딱 이 정도까지입니다. 흥미롭게도 미국이나 영국에선 둔주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게다가 약 20년 후엔 이 진단명은 더 이상 프랑스에서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한 유형의 정신질환이 출현하고, 자리 잡고, 특정 지역과 시대를 장악한 다음, 사라지는 걸까요. 이언 해킹의 <미치광이 여행자>에서는 당대 최첨단 질환에 대한 논쟁이 오히려 새 질환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질병분류학 체계 속으로 쉽게 침투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그와 더불어 당시 프랑스와 주변 국가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며 둔주를 광기의 한 종류로 번성시킨 요인들을 조목조목 알려줍니다.
당시 프랑스는 관광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낭만적 관광여행이라는 미덕과 범죄적 부랑이라는 악덕이 함께 작용되던 프랑스였습니다. 반부랑자법을 적용해 부랑자는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할 사람들로 규명했습니다. 환상충족적 도피와 하층사회에 대한 공포가 동시에 존재하는 겁니다. 둔주는 이 둘의 문화적 관념 사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주지역 밖으로 이동 시 통행증 및 서류가 반드시 필요한 감시, 검열 체계가 작동된 시대였습니다. 걸핏하면 조사받고 서류가 없으면 감옥이나 정신병원행이었다고 합니다. 둔주가 의학적 질환으로 탈바꿈된 데는 탈영병 구제용으로 무죄 탄원의 근거로 사용될 진단이 나와야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한몫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둔주를 도피처, 해방구로서의 기능으로 악용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요. 일상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 무력한 사람들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을까요.
<미치광이 여행자>에서는 많은 분량의 서플먼트, 기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화감독판을 보는 느낌입니다. 알베르와 동행하는 듯한 생생한 묘사도 압권입니다. 티씨에의 보고서에는 "이 새로운 유랑하는 유대인에 대해 우리는 임상관찰을 시작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물론 알베르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하지만 정신의학적 반유대주의 문제에 둔주가 끼어들어가버린 겁니다. 알베르를 유랑하는 유대인 전설을 증명 가능한 실재라고 본 티씨에입니다. 그리고 알베르는 자신이 실험대상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환자와 주치의 가 서로의 필요와 기대에 최적의 상대였던 겁니다.
현재는 해리장애의 여러 증상 증 하나로 격하된 상태입니다. 해리장애 역시 여전히 논란이 많은 정신질환이라고 합니다. 항상 실재성의 문제로 의혹의 대상이 되어온 정신질환의 역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사회에서 정신질환으로 인정되고 허용되는 증상이 다른 시대적 정신질환. 질환의 병인을 찾을 때 오로지 개인의 몸이나 정신에서 찾는 게 비논리적이 되는 겁니다. 실재하는 정신병이었다면 갑자기 사라질 순 없습니다.
<미치광이 여행자>는 둔주 유행병처럼 시대적 정신질환의 실재성을 파헤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닌, 현재 우리의 수많은 정신질환 중 어떤 것이 꾸며낸 것인지, 문화적 산물인지, 의사가 확대시킨 것인지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합니다. 둔주를 광기로 번성시킨 1887년부터 1909년의 프랑스처럼 이 시대에는 또 어떤 정신질환이 둔주와 닮은 꼴일까요. ADHD, 거식증과 폭식증, 분노조절장애, 만성피로증후군 등 이언 해킹 저자는 의심스러운 질병의 목록을 나열합니다.
지금은 잊힌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시대적 정신질환이라는 주제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기묘한 광기의 탄생과 몰락 이야기 <미치광이 여행자>. 방랑벽으로도 불린 둔주 유행병의 이면에 이토록 시대적 상황이 짙게 자리 잡고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기에 묘한 불편함과 뜻밖의 깨달음으로 읽어내려간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