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검 - 정민 교수의 세설신어 400선
정민 지음 / 김영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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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마음과 세상에 대한 사유를 길어 올리는 고전학자 정민 교수의 <일침>, <조심>, <석복>, <습정>,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에 수록된 글 400편을 가려 엮은 통합편집본 <점검>. 소장 가치 있는 만큼 책장에 꽂아두고 한 번씩 펼쳐볼 만한 책입니다.


네 글자라고 하면 사자성어를 떠올릴 텐데요. 익히 알고 있던 사자성어보다는 문장 속에 등장하는 의미 있는 네 글자를 뽑아냈다고 보면 됩니다. '정민의 세설신어'라는 이름으로 무려 12년간 쌓아온 그의 글은 필사하기 좋고, 사유하기 좋은 글로 자리매김했고 <점검>에서 그 정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주제별로 분류하는 대신 찾아 읽기 쉽게 가나다순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목차에서 이미 네 글자와 그 핵심 의미가 나와있어서 쭉 훑어가며 느낌 오는 글을 쓱 골라 읽으면 됩니다.


하나하나 따져서 살핀다는 뜻의 '점검'은 정민 교수의 세설신어를 잘 반영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생각의 중심추를 바로 세우고, 마음의 길을 선명하게 하는 네 글자. 한 자 한 자가 안겨주는 이야기들은 고전의 가치를 일깨우기도 합니다. 불안한 시대에 옛글에서 답을 찾는 것이 습관이 된 정민 교수는 언제나 답을 고전에서 발견해냅니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은 결국 쳇바퀴의 반복을 되풀이하는 존재인가 싶다는 씁쓸함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점검>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한자성어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중국의 역사 위주일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중국 고전 문헌에서 길어올린 글도 있지만, 대부분 조선 시대 인물들이 남긴 에피소드 중심이라 읽는 재미가 더 좋습니다.


선조, 광해군, 인조 시대를 거치며 수십 년을 재상 자리에 앉았던 이원익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나기도 합니다. 높은 신분에도 집은 오막살이 초가 신세로 청빈 그 자체의 삶을 살았다는 이원익을 두고 "이원익은 속일 수 있지만 차마 못 속이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을 했을 정도입니다. 이 문장에서 건져올린 네 글자는 가기불인 可欺不忍입니다. 속일 수 있지만 차마 못 속일 정도라니. 모든 이의 한결같은 존경을 받는다는 것의 가치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군요.


지난해들을 되돌아보며 세월의 흐름에 한숨 내쉬기도 한 저를 뜨끔하게 만든 네 글자도 있습니다. 문득 돌아보면 곁에 없는 것을 뜻하는 가석세월 可惜歲月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밝게 살아도 아까운 시간인데 세월은 손안에 움켜쥔 모래처럼 허망하게 빠져나갑니다. 그저 시간을 죽이고 날을 소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일깨웁니다. 이덕무의 <세정석담>에 수록된 문장입니다.


그러면서도 앞만 보고 내딛던 발걸음이 주춤해질 때는 시련과 적막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네 글자 간위적막 艱危寂寞을 떠올려야 합니다. 한 자락 쉬어 되돌아보고, 점검하며 다짐하는 내성의 시간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적막한 성찰의 시간도 분명 필요합니다. 고요 속에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마음의 길이 비로소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쭉 넘기다 보니 독서에 대한 네 글자 사유도 간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건 무조건 읽으라며 독서 권장 조언 글보다는 읽더라도 제대로 하라는 조언이 비중을 크게 차지합니다. 장자의 <변무> 편에는 독서망양 讀書亡羊이라는 사자성어가 나옵니다. 책 읽다가 본분을 잊고 양을 놓친 일화가 나오는데 당시엔 양이 생계의 든든한 자산이었기에 비교 대상이 됨직하지만, 때로운 양과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독서의 즐거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다산은 일생에 책 읽을 날은 너무도 짧다는 독서일월 讀書日月이란 네 글자를 말했고, 문곡 김수항은 남인의 탄핵을 받아 유배지에서 사사되기 전 자식들에게 독서 없는 미래는 없다는 네 글자 독서종자 讀書種子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독서법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습니다. 입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읽는다는 독서삼도 讀書三到, 독서칠결 讀書七訣이라는 책 읽기의 일곱 가지 비결 등 성현의 말씀들이 인상 깊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군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갖추어야 할 다섯 가지를 논한 작문오법 作文五法, 글 쓸 때 쉬 빠지는 여섯 가지 잘못 작문육오 作文六誤 등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세상 사는 이치와도 다를 게 없는 조언입니다.


마땅히 갖춰야 할 열 가지 처세법, 스스로 경계 삼아야 할 여덟 가지 금기, 남을 헐뜯는 일곱 가지 단서 등 처세와 관련한 성찰의 시간도 가질 수 있습니다. 처음엔 목차를 보며 먼저 눈에 띄는 글부터 읽긴 했지만, 400편이나 되니 하루 한 편만 곱씹어도 1년은 든든하게 마음을 돌볼 수 있겠습니다.


네 글자를 통해 마음자리를 살피고 몸가짐을 돌아보고, 생각을 들여다보고, 세상 이치를 짚어보는 모든 일을 점검하는 시간. 정민 교수의 <점검>은 편견을 깨뜨리게 하고, 아집을 버리게 하고, 시련에 주저앉지 않게 하며 마음의 중심을 잡는 데 도움 되는 책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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