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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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장이 천 개의 말보다 더 충실한 시대의 증인이라 믿는 천주교 사제 장동훈 저자의 <끝낼 수 없는 대화>. 이 책에 등장하는 명화는 성서적 소재의 종교화가 아닌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한 세속화입니다. 보편적 문화로서의 그리스도교가 협소한 의미의 종교라는 이름으로 변화를 거치는 역사 속에서 세속 안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작품은 인간에 대한 저마다의 깊이대로의 고뇌와 질문을 안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궁극의 질문에 닿는 명화 이야기 <끝낼 수 없는 대화>에서는 미술사적 혁신이 아닌 '지금, 여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를 찾는 것에 집중합니다.


먼저 현대 문명과 오늘의 사회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그에 부응하는 명화를 소개합니다. 미국 사실주의 대표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은 특유의 무심함 속에 헛헛함과 고독이 느껴지는 그림이 많습니다. 오히려 그런 분위기가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동훈 저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쉼 없이 부유할 뿐인 인간의 모습을, '깃들지 못함'이라는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발견합니다.


정치 신념의 표현으로서의 프로파간다와 그에 반하는 저항 미술 역시 선전 예술이라고 부릅니다. 흥미롭게도 프랑스 혁명이 선택한 건 단순명료한 고전주의였습니다. 모범적 작품으로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마라의 죽음> 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다가올 시대가 요청하는 시민적 덕목의 청사진이 필요했던 겁니다.


예술이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해도 반드시 진실과 부합하진 않습니다. 현실의 요구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타협할 수 없는 신념과 닿을 수 없는 이상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운 멕시코 사회에서 기획한 국가 주도 예술 프로젝트에 디에고 리베라가 합류합니다. 정부청사로 사용 중인 국립궁전의 <멕시코의 역사> 벽화는 정부 주도 문화운동의 전형적인 모습이자, 정치적 이상의 종교적 표현입니다. 현실은 그림과 달랐으니까요.


'지금, 여기'를 살아내야 하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을 조명한 작품들이 이어집니다. <바벨탑>, <무죄한 영아들의 학살> 등을 그린 브뤼헐은 짐짓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 속에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정치적 비판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바짝 다가가야 그제야 무엇인지 알 수 있기에 더 끔찍하고 더 해학적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곡절에 귀 기울여보라는 인간성에 대한 호소를 담은 작품들을 대면하다 보면, 일상을 짊어지고 전진하는 무명씨들에게 보내는 응원이 되기도 한다는 걸 짚어줍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최후의 심판>에서는 현실과 이상을 동시에 짊어져야 하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고찰을 만날 수 있고, 도미에의 작품들에서는 도시의 화려함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고된 일상과 허무를 견디고 살아가는 도시민의 애환을 위로하는 따스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상품처럼 소비되고 있는 종교와 교회의 내일을 묻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선교사로 중국 황실 화가로 살면서 정작 직접적 선교 활동은 배제된 채 궁정에서 주문한 그림을 그려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비종교적인 일에 열성을 다했던 건 지름길이 아닌 한참을 걸어야 하는 에움길 역시 선교라는 본연의 목적에 가닿는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처럼 성과 속, 교회와 세상을 첨예하게 나누는 이원론을 뛰어넘어 역사를 더욱 인간답게, 세상을 더 낫게 하는 것이 오히려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짚어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프리카 난민들의 목숨이 사라져간 바다에 꽃을 던지며 애도하고 무관심의 세계화라는 비극에 애통해했던 것처럼요.


한국 화가의 작품도 등장합니다. 홍성담의 판화와 민중미술의 선구자로 전해져오는 오윤의 작품들이 인상 깊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있는 그대로의 현실 고발이 아니라 현실의 조금 앞쪽,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던 것들과 그래서 되찾아와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합니다. 현실과의 대화를 지향하는 민중미술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시대와 이념, 신념과 체제, 이념과 현실의 사이에서 힘겹게 피워낸 예술가들의 성취를 만나봅니다. 방황하는 거인의 모습을 그린 고야의 작품들에서는 확실한 아무것 없이 환멸과 희망을 거듭하며 더듬거려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한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대패질하는 사람들>처럼 적나라한 현실감으로 고된 노동의 현장을 담아내며 현실로 눈을 돌린 작품들도 있습니다.


격변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삶을 위한 예술로서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을 만나는 시간 <끝낼 수 없는 대화>. 작품이 스스로 건네고 있는 영감에 귀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전염병 종식과 박멸만이 모든 담론을 집어삼킨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여기' 꼼짝없이 갇힌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는 현대인들을 위해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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