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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
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1월
평점 :
입소문 나서 많이들 읽으면 좋겠다 싶은 소설입니다. 책탑이 가득하지만 책 소개 글을 읽고 찌르르한 느낌이 와서 책 도착하자마자 단숨에 읽어내려간 <단절 Severance>.
중국계 미국인 링 마 (Ling Ma) 작가는 기자와 편집자 생활을 끝내고 퇴직금에 의존해 생활하면서 집필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2011년 시카고 눈사태로 교통과 직장이 마비되는 상황을 겪으며 '과연 재난이 닥쳤을 때 회사들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이 소설의 영감으로 작용합니다.
“종말이 지나고 새로운 서막이 열렸다.”라는 첫 문장은 종말에 가까운 위기를 겪고 새 희망의 시대를 여는 건가 싶겠지만, 어째 애매합니다. 생존자 “아홉은 줄어들 일만 남은 숫자”라는 말이 으스스합니다.
소설 <단절>은 곰팡이 감염 질환인 선 열병(Shen Fever)이 세계 곳곳을 잠식하는 가운데 뉴욕이 붕괴되는 여정을 보여주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와 뉴욕을 탈출한 생존자들이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현재 시점을 오가며 재난이 닥쳤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나'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원서가 2018년에 출간되었으니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범지구적 재난을 겪고 있는 이 시대를 예견한 이야기가 아닌 싶을 정도로 책 속 재난 사태와 현재가 닮았습니다. 인상 깊게 읽은 <트릭 미러>의 지아 톨렌티노 작가는 여태 읽은 밀레니얼 세대에 관한 소설 중 최고라고 말할 정도로 오늘날 밀레니얼 세대의 인생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인공 캔디스 첸은 출판 컨설팅 업무를 맡은 담당자로 대형 출판사들의 의뢰를 받아 아시아의 공장에 발주하는 상품 코디네이터입니다. 책 제작 과정에서 보다 저렴한 인건비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나라로 발주하는 일을 하면서 노동집약적이란 의미가 무엇인지 이내 경험하지만 5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즈음부터 뉴욕에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고, 다들 뉴욕을 벗어나는 분위기입니다. 회사에도 확진자가 생기자 결국 회사는 재택근무 체제로 전환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님도 이미 사망하고 홀로 살아온 캔디스는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습니다. 이미 뉴욕에 진저리 나 있었던 남자친구 조너선으로부터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받지만, 캔디스는 결국 관계를 끊는 것으로 대처합니다. 그저 회사를 오가며 일에만 몰두하면서, 모두 떠나고 남은 빈 사무실을 지킵니다.
"이 열병은 반복의 열병, 루틴의 열병이다." - 단절
<단절>에 등장하는 선 열병은 기억력이 점차 감퇴하면서 습관적으로 하던 행동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병입니다. 열병에 걸린 매장 직원은 티셔츠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능숙히 개고 또 개고 있습니다. 기억의 병인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각자가 지닌 기억에 무한히 갇히는 셈입니다. 좀비처럼 이지를 잃은 사람들. 똑같은 루틴만 내내 반복하다가 퇴화하는, 무한한 루프 속에서 흘러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이토록 은유적으로 빗댈 수 있다니요.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들. 텅 빈 뉴욕에 끝까지 남아있던 캔디스조차 뉴욕이 붕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회사를 오간 겁니다. 열병이 미치지 않은 아직 추운 국가들은 기본적인 기능을 하고 있지만 봉쇄 조치로 문을 굳건히 잠갔습니다. 일거리도 없게 되자 캔디스는 몰락해 가는 도시의 곳곳을 사진으로 담아 블로그에 올리는 걸로 새로운 루틴을 삼습니다.
현재는 생존자 아홉 명이 모였습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극소수의 생존자가 된 상황에 막대한 수치심을 느꼈다.”며 탈출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행동, 무엇으로든 위안 받으려 하는 행동,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서 무언가를 훔치는 행동 등 겁쟁이, 위선자, 사악한 거짓말쟁이인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이내 리더가 생깁니다. 생존자는 선택받은 자들이라며 미래를 만들어갈 책임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리더입니다. 리더가 제시하는 규칙에 따라 그들은 함께 행동하고, 역할 분담을 하며 생존해나갑니다.
중국계 미국인 링 마 작가의 정체성도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담겨 있습니다. 캔디스의 가족사를 통해 이민자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미국인스러움을 연기하고 연마하며 자신을 받아들여 준 나라에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애쓴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자란 캔디스. 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열병 환자는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재택근무로 전환된 후에도 선 열병의 확산이 멈추지 않자, 뉴욕의 기본 인프라 유지 관리 인력도 서서히 줄어들고 결국 한 도시가 붕괴되는 과정을 무감한듯 섬세한 내면 묘사로 보여주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단절>. 팬데믹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법한 이야기입니다.
페이지가 몇 장 남지 않은 시점에서도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도시의 설계 목적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도시의 일정과 리듬에 적응한다는 것은 그런 시스템에서 기어코 즐거움을 얻겠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선 열병에 걸리지 않은 워커홀릭 캔디스의 행동을 곰곰이 지켜보면서 과연 정말로 선 열병에 걸리지 않은 것일까, 걸린 것일까의 경계가 애매하게 느껴질 정도로 도시가 붕괴되었을 때 습관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 건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루틴을 반복한다는 것의 이면을 끄집어 낸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