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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철학 - 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인문학 편지
윤성희 지음 / 포르체 / 2021년 10월
평점 :
편지 큐레이터 윤성희 저자의 신간 <다산의 철학>. 관계를 이어주는 손편지의 매력을 듬뿍 전한 전작 <기적의 손편지>를 감동 깊게 읽었는지라 오랜만에 만나는 신간도 반가웠습니다. 500여 권의 책을 남긴 조선의 대표 학자 다산 정약용을 다룬 책은 많지만 윤성희 작가만의 큐레이션은 역시 빛을 발휘하네요. 다산이 아들, 친구, 제자 등에게 쓴 편지에 담긴 조언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는 걸 건져올린 <다산의 철학>.
다산 정약용은 6남 3녀 중 4남 2녀를 먼저 떠나보냈고, 학문적으로 의지하며 동료와도 같았던 형제들의 고난을 목격하기도 했고, 그 자신도 18년의 유배생활을 하며 사적으로 공적으로 세월의 풍파를 많이 겪은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의 흔적이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다산의 사고방식과 실천적 행동은 중심을 지키는 신념에서 비롯됩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처럼 조선의 그들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다산의 제자 윤혜관은 선비라는 이상과 가장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나 봅니다. 농사도 장사도 할 수 없는 선비는 어떻게 살림을 좀 펴게 만들 수 있을까요.
다산은 작은 밭에 과일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라고 조언합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치는 것도 좋다고 합니다. 즉 본캐와 부캐 모두 잘 돌보라는 의미입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밭을 가꾸되 본캐인 선비의 본질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당부합니다. 논어, 주역 같은 책을 꾸준히 읽으라고 합니다.
윤성희 저자는 다산의 꿈을 현실에 발을 디딘 채로 꾸는 것으로 짚어냅니다. '나'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오히려 가능한 N잡러의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나를 잃어가면서 좇는 꿈은 허무한 것이라는 거죠. "진정한 N잡러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를 원하며 꿈을 꾸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다산의 명쾌하면서도 담백한 말이 와닿습니다. 재미있는 건 다산이 유배지에 있을 때 쓴 아들의 편지에는 도성으로 이사하기 전, 과일 심고 채소를 가꾸어 생계를 도모하면서 집안 살림이 좀 넉넉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옮기자고 하기도 했습니다.
서출은 벼슬에 나갈 수 없어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다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 서출 동생인 약횡에게 다산이 쓴 편지도 있습니다. 솔직히 놀랍더라고요. 깨어있는 자라는 걸 실감하게 한 편지였습니다. 같은 아버지에서 태어났지만 출발선이 달랐던 서출 동생에게 도착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철저히 평소 자기관리를 잘 하라고 당부합니다. 정해져 있는 신분, 환경은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다산의 철학>에는 이처럼 세상이 정한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나'를 위한 현명한 조언이 가득합니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린 게 있는데요. 유배지로 가 있는 사이 그들의 집도 한양 도성에서 내쳐지자 아들에게 순간의 분노로 시골행 하지 말고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도성으로, 하다못해 도성 근처에라도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는 편지입니다. 속물 같아 보이지만 다산은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당부에 가깝습니다. 문화를 보는 안목을 키우는 곳으로서 도성의 중요성을 짚어냈고, 이는 곧 세상의 변화를 읽어내는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생존을 위한 기본 옵션인 적응력과 유연성을 갖추라는 의미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외모지상주의는 있었습니다. 유난히 체구가 작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외모로 판단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용기를 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다산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 황상에게 보낸 편지도 있습니다. 자신은 남들처럼 공부 잘하는 재주가 없다고 말하는 황상에게 다산은 반복과 습관의 힘을 들려줍니다. 부지런한 루틴을 만들어 미라클모닝의 힘을 이미 이야기한 다산입니다.
<다산의 철학>은 딱딱한 해설서가 아닙니다. 이 책에 실린 다산의 편지 원문은 <마음챙김의 인문학> 책으로 제 마음을 사로잡은 임자헌 작가의 번역으로 실려있어 원문도 술술 잘 읽히는 매끄러운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인문학과 자기계발을 연결한 윤성희 작가의 해석이 놀랍도록 근사합니다. 다산의 편지에서 건져낸 통찰의 수준이 부러울 정도였어요.
저마다의 고민으로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산이 전하는 위로와 용기의 말 <다산의 철학>. 번지르르한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신념으로 시작해 생각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고,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며 타인과 공존하며 잘 살아가는 법을 실천할 수 있는 명쾌한 조언으로 가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