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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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잃지 않도록, 성숙해지도록... 삶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삶의 화두가 담긴 책 <걷는 독서>. 시인, 사진작가, 혁명가로 불리는 박노해 작가가 들려주는 한 문장이 길어올리는 사색의 시간을 만끽해보세요.


노동운동가 시절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 문구에서 딴 필명 박노해로 활동하며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은 금서였음에도 100만 부 기록을 세웠고, 군사독재 정권에서 사형을 구형 받고 무기수로 복역하다 7년여 만에 석방된 박노해 시인. 반전평화운동에 전념하며 현장의 진실을 기록해온 그는 고난의 인생길에서도 자신을 키우고 지키고 밀어 올린 것은 '걷는 독서'였다고 합니다.


"'걷는 독서'는 나의 일과이자 나의 기도이고 내 창조의 원천이었다." - 걷는 독서 


책 속의 활자와 길의 풍경들 속에서 '걷는 독서'를 해온 그는 무기수로 독방에 던져졌을 때조차 두 걸음 반짜리의 작은 독방에서 '걷는 독서'를 계속했습니다. 철저히 고립된 공간 속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광활한 정신 작용을 할 수 있게 한 '걷는 독서'. 자유의 몸이 되고서도 그렇게 걷는 독서는 계속되었습니다.


표지를 장식한 걷는 사람 이미지는 2008년 알자지라 평원에서 만난 '걷는 독서'를 하는 소년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선조들의 복장과 걸음과 음정 그대로 낭송하는 '걷는 독서'는 근대 묵독 이전의 전통으로 오래된 독서 행위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휴대폰이나 보면서 걸을 뿐이지 걷는 독서를 해 본 경험이 없는 저는 글쎄요. 언제쯤에나 해볼 수 있을까 싶다가도, 독방에서도 하셨는데 우리집 정도쯤이야. '걷는 독서'가 가진 의미만큼은 이참에 깊게 새겨두려고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는 삶의 길잡이가 되어줄 명문장 423편이 수록되었습니다. 20여 년간 직접 찍은 작은 컬러사진이 어우러져 시각적으로도 호강하거니와 짤막한 한 문장을 소리내어 읽기 좋고 필사하기 좋은, 오감을 자극하는 책입니다. 한국문학 번역의 대가 안선재 서강대 명예교수의 영문 번역이 함께 있어 영어로 소리내어 읽었을 때의 색다른 느낌도 받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었다'와 '읽어버렸다'의 차이를 아시나요. 읽어버리는 순간 소멸의 자리만큼 진정한 나를 마주하고 새로운 삶을 잉태하는 하나의 성소가 된다고 합니다. 온 삶으로 읽고, 잃어버린 것을 살아내야만 한다고 합니다. 독서의 완성은 '삶'이니까요.


참된 독서의 의미를 되새겨봅니다. 박노해 시인은 책을 읽지 않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버리는 것이 책을 많이 읽는 거라고 합니다. 머리로 외우고 익힌 지식은 쉬이 잊히기에 창조성을 깨어나게 하려면 조금 더 심심해져야 한다는 거죠. "경험은 소유하고 쌓아가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 나를 소멸해가는 것이다."처럼 이쯤 되면 "따사로운 햇살은 파릇한 밀싹을 어루만지고, 그는 지금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입 맞추며 오래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걷는 독서'의 가치를 짐작하게 됩니다.


"진정한 독서란 지식을 축적하는 '자기 강화'의 독서가 아닌 진리의 불길에 나를 살라내는 '자기 소멸'의 독서다." - 걷는 독서 


"삶은 짧아도 영원은 사는 것. 영원이란 '끝도 없이'가 아니라 '지금 완전히' 사는 것이다."처럼 일상을 살아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걷는 독서>. 그렇다고 해서 일상을 이벤트처럼 살아내는 것은 안된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충분함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만을 위한 나가 아닌 나만의 이야기를 쌓아올려 온몸으로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한 문장이 가득합니다.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사회 문제를 고뇌하며 깨달은 한 문장, 내면의 상처를 바라보며 치유에 이르는 한 문장, 실수를 후회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성찰로 이끌어내는 한 문장, 자기 자신을 찾는데 도움되는 한 문장 등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으며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기로 한 박노해 시인. 한 편 한 편 읽다 보면 내 삶의 수많은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머리 굴리지 말고 욕심 세우지 말고 겉멋 부리지 말고 단순하게 그냥 가기. 본질로만 승부하기.", "나 어떻게 살 것인가 막막할 때는 어떻게 살지 말 것인지를 생각하라." 등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은 사색의 시간을 안겨줍니다. "여행은 편견과의 대립이다.", "패션은 사상이다."처럼 짧은 한 문장만으로 사상의 정수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전을 보는 듯한 압도적 두께감을 자랑하지만, 앙증맞은 판형에 하늘빛깔을 담은 시원시원한 편집이 부담스러움을 덜어줍니다. 사유의 밀도가 함축, 응축된 한 문장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걷는 독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특별히 마음을 사로잡는 한 문장은 달라질 테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페이지를 펼쳤을 때 쏟아지는 삶의 기본 원칙이 되는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루 한 문장씩 낭송하며 필사하기 좋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유를 끌어내는 소중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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