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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사람
문기현 지음 / 작가의서재 / 2021년 8월
평점 :
언제 사라져도 모를 시간 앞에서 하염없이 살아가는 틈의 이야기들 <하얀사람>. 문기현 작가의 전작 <감정일기>에서 깊은 감정의 소중함을 들려주며 매번 느끼는 감정들 속에서 추억하는 삶의 시간을 이야기했다면, <하얀사람>에서는 틈으로 표현한 삶을 들려줍니다.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자리를 뜻하는 '틈'. 나의 틈, 타인의 틈, 현실의 틈, 슬픈 틈, 변하지 않는 틈처럼 수많은 틈에서 살아가는 우리. 어떤 틈은 보호막이 되지만, 어떤 틈은 자아를 파괴하는 틈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끼여 버렸다. 어느 틈인지 모를 정도로 나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 하얀사람
틈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하얀사람>. 살아오면서 겪어온 삶의 무게가 가벼운 이는 없을 겁니다. 틈 사이에서 헤매면서도 여전히 어느 틈에나 껴 있는 저마다의 삶. 조금 더 나를 잘 살아내지 못했던 현재에게 미안해하기도, 과거를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지 못해서 슬퍼하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였기에 괜찮은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그리워하고 추억하고 슬퍼하는 틈의 기록이 펼쳐집니다.
하얀사람이라 일컫는 '그녀'의 틈 안에서 살아갈 때 따스한 기운을 얻는 작가. 궁색한 기억이라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과 감정이 오롯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녀는, 엄마입니다. 가끔은 누나도 등장하고, 돌아가신 이모도 등장합니다.
외면했던 것들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음을 깨달으며, 그로 인해 다시 나를 찾고 있는 작가는 엄마와 누나의 걱정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깨달으며 그녀들의 틈에서 잘 살아내려고 노력합니다.
늘 어딘지 모를 갈림길에 서 있는 틈 사이에서 헤매는 것 같은 불안함. 불안한 감정에 지배당하느라 스스로도 그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힘듦을 잘 살아내면 결국 그렇게 살아왔던 삶이 나의 무기가 된다는 믿음을 안겨준 그녀의 말처럼 짙은 감정의 결을 오롯이 바라보며, 재생과 치유의 시간을 가집니다.
글을 쓰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그것은 온전치 않은 자아를 꺼내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은 틈이 만들어 놓은 인간적인 선물"이라며 마음이 불안해지고 생각이 짧아질 때면 세상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는 책을 펼쳐듭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그들의 장단에 맞춰서 살아가야 하는 틈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익숙해져 버리면서 나의 틈이 사라짐을, 자아가 파괴당하는 시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백지에 타인의 흔적이 남는 겁니다. 하얗게 모든 것을 다시 백지화시켜버리며 하얀 사람이 되려고 애를 써도, 여전히 나의 백지에는 '하얀 한 줄'이 남겨져 있습니다.
반대로 하얀 백지이기 때문에 더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시간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하얀 백지에 무엇을 채울지 말입니다. "살아갈 것인가 혹은 살은 채 죽어 갈 것인가". 무수한 고뇌와 함께 어떠한 삶을 살아낼지 고민합니다. 산다는 건 어느 틈에 껴있다는 의미입니다. 틈은 나의 시간이자, 나의 이유입니다.
나라는 자아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잘 맞추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얀 백지 위에 크고 작은 선을 그려가는 삶. 나와 당신, 세상의 틈을 성숙한 시선으로 이야기하는 <하얀사람>. 여전히 불현듯 불안한 감정이 찾아와 아파하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며 매만진 전작 <감정일기>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게 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