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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빅터 라발 외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6월
평점 :
마거릿 애트우드, 리브카 갈첸, 빅터 라발 등 이 시대 주목받는 작가 29인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만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책 <데카메론 프로젝트>.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봉쇄 조치 등 팬데믹 시대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의 낯선 경험이 낳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데카메론 프로젝트>는 고전 문학 <데카메론>과 닮았습니다. 1353년 흑사병 시대에 탄생한 소설 <데카메론>은 14세기 페스트의 잔학무도함에 무력해진 유럽의 모습을 100편의 이야기로 보여줍니다. 그간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을 한 시대가 낳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우리 시대의 데카메론이 기획됩니다. 뉴욕 타임스에 <데카메론>의 리뷰를 싣고자 했던 리브카 갈첸의 제안을 계기로 말이지요. 그렇게 작가들은 한 편 한 편 그들의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리브카 갈첸의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들>는 <데카메론 프로젝트>의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코로나로 휴관 중인 수족관과 미술관에 펭귄이 관람하는 영상을 유튜브에서 봤었는데, 저자도 그 영상을 보며 뜻밖의 힐링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저자의 말로는 그 감정이 바로 '감정적 보호막'이라고 합니다. 현실도피성 이야기에서 역설적으로 도망쳤던 곳으로 복귀시킨 <데카메론>처럼 "어려운 시기에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시기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그 시기를 끈기 있게 버텨내는 방식"이니까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메멘토 모리 대신 "너는 살아야 할 운명임을 기억하라"라는 메멘토 베레레(Memento vivere) 메시지를 안겨주는 데카메론의 의미를 되살립니다.
소설 <블랙 톰의 발라드>로 인상 깊은 빅터 라발 작가의 글도 작가 특유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좋았어요. 봉쇄 조치로 인해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소수의 사람들만 남은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초자연적 공포 분위기도 슬쩍 안겨줘 역시 빅터 라발 다운 이야기구나 싶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것도 공통된 취미를 공유하지 않지만 사귀고 있는 커플이 봉쇄 조치로 집에 머물며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자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콜럼 토빈 작가의 <LA강 이야기>도 인상 깊었습니다. 행복한 커플에 대한 환상 대신 실제 있을법한 이야기여서 오히려 더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더라고요. 그나저나 LA강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청계천 복원사업의 노하우가 전수된 곳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작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읽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데, 역시 마거릿 애트우드 작가의 이야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팬데믹으로 격리 중인 지구인들을 위해 은하계간 위기 지원 프로그램이 발동해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이 방문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구인을 위로하지요. 데카메론의 액자소설 형식 구조를 그대로 따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다가 결말이 주는 깊은 의미까지, 가장 데카메론적인 구성이라 친근감이 듭니다.
데카메론의 구성을 따온 소설은 레이철 쿠시너 작가의 <빨간 가방을 든 여인>도 있습니다. 일주일 간 성에서 머물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기로 한 사람들. 질병, 슬픔, 죽음에 대한 것 외에 행복한 이야기만 하자고 합니다. 나도 모르게 홀리듯 빠져들게 하는 스토리입니다.
120일간의 격리 후의 이야기를 쓴 에트가르 케레트 작가의 <바깥>도 재밌어요. 이미 그 생활에 익숙해진 탓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강제로 나오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입니다. 인간의 탁월한 적응력에 대한 반전 결말까지 인상 깊습니다. 캐런 러셀 작가의 <마지막 버스 클럽>은 위기의 순간에 시간이 멈춘 초자연적 현상을 일상이 멈춘 팬데믹 시대를 잘 표현해 멋졌어요. 미아 쿠토의 <친절한 강도>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진지하게 표현해서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 이해하는 순간 제대로 빵 터질 정도로 정말 재밌었어요. 매튜 베이커의 <기원 이야기>도 유쾌한 반전이 즐겁습니다. 봉쇄 기간 중 한 집에 모인 가족은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씩만 먹어야 하는 배급제 방식 때문에 박탈감과 좌절감을 가집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지 궁금하게 만듭니다.
평소라면 출판해 주지 않았을 이야기들일지도 모릅니다. 실험적 소설도 많아서 읽는 맛이 낯선 경우도 많습니다. 뷔페에서도 손 한 번 가지 않는 음식이 있듯, <데카메론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아이디어 창고 속에서 창의적 영감이 샘솟는 기분이 드는 데다가 기대 없던 이야기에서 뜻밖의 감동을 받기도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데카메론 프로젝트>. 미래에는 페스트 시대의 <데카메론>과 함께 코로나19 시대에 탄생한 <데카메론 프로젝트>가 함께 회자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