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있던 자리에
니나 라쿠르 지음, 임슬애 옮김 / 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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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을 주제로 한 청소년 문학 <우리가 있던 자리에>. 주인공이 청소년일 뿐 상실감에 대한 상처의 깊이와 회복의 과정이 성인이 읽어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다가 담담하면서도 가슴 아리게 하는 문체가 인상 깊은 작품입니다.


2020년 청소년 교양도서로 선정된 <우린 괜찮아>의 작가 니나 라쿠르의 데뷔작이 바로 <우리가 있던 자리에>입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감정들을 다루는데 탁월한 니나 라쿠르 작가의 작품, 무척 매력적입니다. <우리가 있던 자리에>는 2009년 원서 출간 이후 꾸준한 인기에 힘입어 2019년 개정판으로, 그리고 이번에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네요. 점선 절취선을 뜯어내면 책갈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책날개 디자인이 센스만점입니다.


고등학생 때 인생 최악의 사건을 마주한 케이틀린. 영혼의 단짝과도 같았던 베스트프렌드 잉그리드의 자살은 케이틀린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해 여름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한 나날들이 이어집니다. 자신만의 동굴에서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잉그리드에게서 조금씩 보였던 자해 흔적. 그때 도와달라고 알렸어야 했다며 죄책감과 후회만 가득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잉그리드가 케이틀린의 방에 남겨둔 일기장을 발견합니다. 이 일기장을 읽어버리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섣불리 읽어내려갈 수 없었지만, 힘겹게 한 장씩 넘깁니다. 잉그리드의 일기장이 케이틀린에게 독이 될지 약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생각이든 떠오르는 대로 서로에게 말했던 사이였는데 일기장에는 자신에게 직접 하지 않은 이야기들만이 있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케이틀린이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던 거라면 그조차도 자신의 무기력함에 죄책감이 듭니다.


잉그리드의 아픔을 몰라서는 안 됐다는 자괴감. 케이틀린은 친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가족이 모르는 것도 알아채 주는 존재로서의 친구 말입니다. 잉그리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똑똑히 알아줬어야 했다고 후회합니다.


새 학기가 시작된 학교생활은 여전히 수많은 감정에 허덕이는 케이틀린을 분노에 차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친구들의 "괜찮아?"라는 질문조차 말이 안 되는 질문처럼 들리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는 척 대하는 것도 힘들게 합니다.


사진에 재능이 있었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한 잉그리드와 케이틀린. 잉그리드와 죽이 잘 맞았기에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추억을 쌓았지만, 이제 홀로 남겨진 케이틀린은 사진 수업조차도 괴롭습니다. 사진 선생님도 케이틀린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잉그리드의 친구 자격으로만 자신을 봐왔던 걸까 싶어 고통스럽고 화가 납니다.


투명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을 느끼는 케이틀린의 감정이 담담하게 또는 절절하게 묘사됩니다. 가끔은 가장 만만한 엄마에게 쏟아내는 케이틀린의 뒤틀린 표현도 공감됩니다. 고통을 겪는 딸을 대하는 부모님의 심정도 안타깝습니다. 놀라운 건 케이틀린의 부모님의 태도였어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반성할 정도로,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주는 부모의 모습에서 배울 게 많았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친구도 있습니다. 전학 온 친구와의 관계맺음은 특히 케이틀린의 치유 여정에 큰 영향을 줍니다. 괜찮냐고 묻는 사람들보다 상실감을 경험해본 그 친구의 "힘들겠다."는 말 한마디에 고마운 감정을 느낍니다.


가장 친한 친구였음에도, 잉그리드를 살릴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은 새로운 친구와의 우정을 쌓아가는데도 방해가 되곤 합니다. 새로운 친구와 웃고 즐기는 것조차 잘못된 일인 것 같습니다. 후회, 짜릿함, 아픔이 뒤섞인 케이틀린의 복잡한 심정을 잘 그려낸 소설 <우리가 있던 자리에>.


케이틀린은 상실을 어떻게 치유할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 절절함을 잘 아는 이도 있고, 누군가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슬퍼할 이유가 딱히 없는 이도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도 애도와 공감을 표현하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끼던 사람의 상실을 겪은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의 표현 방식도 저마다 다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분노하기도 하고 치유받기도 하는 케이틀린의 회복 여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저 세월이 약이라는 식으로 그려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있던 자리에>는 작가의 경험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고 합니다. 함께 어른이 될 줄 알았던 고등학교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상실의 슬픔을 알게 된 니나 라쿠르 작가. 친한 친구가 아니었음에도 충격, 혼란, 상실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공유하는 행위만으로도 애도와 치유의 여정에 도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멋진 소설이 탄생했습니다.


"삶은 변화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할 때 다시 나타나 우리를 꼭 안아준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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