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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모네이드 할머니
현이랑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4월
평점 :
겉으로는 평화로운 도란마을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리와 악. 치매 할머니와 여섯 살 꼬마가 나섰다?! 한국판 코지 미스터리 소설의 새로운 판을 보여주는 현이랑 작가의 <레모네이드 할머니>. 긴장감과 유머의 조합이 멋지게 어우러지면서 감동 한 스푼까지 담긴 소설 만나 보세요.
치매 노인들의 마을이자 완벽한 고급 요양병원 도란마을. 월 1000만 원의 월세를 내는 부자들의 세상입니다. 자식들은 한 달에 한 번 옆 골프장에 놀러 왔다가 얼굴 잠깐 비추고 가면 되고, 도란마을에 근무하는 의사, 간호사, 요양사들도 다른 요양원에 비하면 두둑한 월급을 받는지라 나름 다닐만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가 윈윈하며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일들이 이곳에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습니다. 저마다 감춘 갈등 하나 없는 사람 없고, 저마다 비밀을 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정신이 말짱한 할머니가 있습니다. 치매 초기 증상이지만 자식도 없고, 가진 건 돈뿐인 부자 할머니입니다. 새콤달콤한 맛이 머리를 팽팽 돌게 하는 레모네이드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을 비롯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건 싫어합니다. 그렇게 셀프왕따를 자청하던 할머니에게 당돌한 꼬마 소년이 들러붙습니다.
이혼 부모를 둔 여섯 살 소년은 의사인 엄마와 함께 이 마을에서 살면서 또래 친구와는 가까이하지 않더니 할머니에게만 은근슬쩍 마음을 풉니다. 아이들을 골려먹으며 내치기 좋아하는 할머니에게서 무얼 발견했길래 무서워 보이는 할머니 곁에 머무는 걸까요.
사건은 평화롭기 그지없던 어느 날 일어납니다.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영아 사체. 갓 태어났지만 이미 죽은 아기가 비닐에 쌓인 채 버려진 겁니다. 특유의 촉이 발동하는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아기를 죽인 범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은근 환상의 콤비를 자랑하는 꼬마와 함께 말이죠.
미스터리 탐정 소설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각자의 시점에서 진행하며 저마다 가진 고민과 비밀을 독자에게 알려줍니다. 이곳을 거대한 연극 무대처럼 보는 레모네이드 할머니, 학대의 트라우마를 겪는 꼬마, 학대를 일삼는 남편 곁에서 버티려 애쓴 꼬마의 엄마, 고시원에서 지내며 비정규직 인턴 요양사로 일하는 20대 청년, 외부의 눈만 신경 쓰며 정작 가족끼린 무관심한 원장 가족 등 친절로 포장되어 있는 가짜 세상의 어두운 면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 하나씩 보여줍니다.
"이 미친 세계에서 혼란은 정신이 온전한 자의 몫이다." - 책 속에서
그 와중에 치매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빠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자였어도 결국 치매로 다시 아기가 된 노인들. 우리 모두 언젠가 나이가 들어 늙은 몸을 가지게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우리의 정신세계는 '젊음'에 초점 맞춰져 있는 그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추함, 더러움, 멍청함 등의 온갖 역겨운 수식어들이 따라다니는 '늙음'에 대한 생각들. 아닌 척 감추는 대신 냉정하게 드러내며 저세상급 시니컬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어도 치매는 치매다. 누구도 도망가지 못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뇌는 날로 쪼그라들고,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진다. 더 괴로운 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땐 흘릴 눈물조차 없어진다. 왜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 책 속에서
돈에 고개 숙이는 세상을 적나라하게 들추면서도 그 속에서도 온전히 마음을 주고받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 <레모네이드 할머니>. 고급 요양 병원의 비밀을 파헤치는 할머니와 꼬마의 콤비는 유쾌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어 정겹습니다. 현란한 추리도 없고 치밀한 수사 전개는 없지만, 날카로운 눈과 호기심을 가진 레모네이드 할머니의 매력이 탁월한 소설입니다. 잔혹한 묘사 없이도 심각한 사건과 인간 말종 세태를 보여주며 사건의 비밀이 밝혀지는 절묘함이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