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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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16일, 미국 LA 한인마켓에서 15세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는 총을 맞고 숨집니다. 주스 한 병을 가방에 넣는 것을 보고 절도범으로 생각하고 잡으려 한 주인은 체격이 컸던 소녀에게 주먹으로 몇 차례 맞은 이후 카운터 뒤에 숨겨둔 총을 집어 뒤로 돌아선 소녀를 향해 발포했습니다. 이 사건은 두순자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다음 해 LA 폭동 사태 때 한인타운의 피해를 촉발하는데 큰 영향을 끼칩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스테프 차는 두순자 사건을 모티브로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Your House Will Pay)>를 내놓았습니다. 1991년과 2019년을 오가며 한인과 흑인 두 가정의 이야기 속에서 미국 사회 속 인종 차별과 혐오의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들여다봅니다.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모른 척 지나가기는 너무나 쉬운 세상.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알폰소 쿠리얼의 추모 행사에 참석한 그레이스 박은 쓰라린 부끄러움과 정의로운 열정에 사로잡힙니다.


이민자 기백으로 열심히 살아온 부모 밑에서 어머니와 인연을 끊고 따로 사는 언니를 대신해 착한 둘째 딸 노릇을 하고 있는 그레이스. 한인 마켓의 약사로 가족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가끔은 가부장적인 한국 가정의 모습에 답답해하기도 하고, 이상한 긴장감이 있는 가족 분위기에 불만이 있으면서도 가족애가 남다른 그레이스이기에 그러려니 합니다.


하지만 그 평화로움은 주차장에서 엄마가 총에 맞으며 산산조각 납니다. 빈민가 뒷골목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중년 부인을 누가 왜 해치고 싶어 한 건지 경악스럽습니다. 하지만 언니에게서 나온 말은 충격적입니다. "엄만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레이스."


흑인, 인종, 인종차별을 암시하는 말이 나오면 긴장하는 집. 여기엔 28년 전 그레이스를 임신한 엄마가 가게에서 한 흑인 소녀를 총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레이스만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던 겁니다.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된 엄마를 둔 그레이스의 시점과 어린 나이에 죽었던 소녀의 동생 숀의 시점으로 진행하는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합니다. 고통을 견뎌내는 한인 가정과 흑인 가정은 닮은 듯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갱단에 들어가는 건 허세를 부리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과정이었지만, 결국 교도소 생활까지 하고 나온 숀은 이제는 마음을 다잡아 성실하게 생활합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촌 형 대신 사촌네 가족을 돌보며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두움이 가득합니다. 누나의 죽음이 안긴 분노와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숀은 아주 오랫동안, 세상의 이목에 붙잡혀 있을 뿐, 한번 탁 하고 부러지는 순간 아무것도 거칠 것 없어질 감정과 싸워왔다." - 책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깡패들만 죽임을 당한다고 믿으려 하지만, 체계화된 인종차별은 무차별적이라는 걸 처절하게 알고 있는 흑인 커뮤니티. 그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게 좌절감을 안기는 차별입니다.


과속 혐의로 체포된 흑인 로드니 킹이 4명의 백인 경찰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지만,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나오자 인종 폭동으로 번진 LA 폭동. 요즘 세대에겐 낯선 이야기일 테지만 당시 4·29 폭동의 한가운데서 가게를 지켜야 했던 첫째 이모네 가족을 둔 저는 당시 식구들이 불안에 떨며 통화를 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만 해도 흑인 대 한인의 구조로만 바라봤고, 흑인에 대한 두려움만 커진 채 그 이면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습니다.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를 읽으며 LA 폭동이 로드니 킹 사건으로 경찰이 곤경에 처하자 시선을 돌리려고 두순자 사건을 이용해 한인 사회로 분노를 터트리게 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부촌에만 있었고 한인타운은 쓰러지게 그냥 뒀습니다.


"그들은 한 몸이 되어 본능적으로 위협에 손을 뻗어 반응하는 것 같았다." - 책 속에서


엄마는 28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이제 벌을 받은 걸까요. 엄마에 대한 동정심, 분노, 사랑, 혐오가 뒤섞인 그레이스. 끔찍한 진실을 기억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저 배부른 희망일까요. 공포를 가리는 희망과 행복을 구하는 그레이스의 심리를 스테프 차 작가가 내밀한 묘사로 펼쳐 보입니다.


분노를 죽이며 힘들게 일군 생활을 새로운 총격 사건이 터지며 평온이 흐트러지게 된 숀의 감정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여자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이게 정의인가? 의문스럽습니다.


마음속 깊숙이 묻어뒀던 일이 봉인이 풀리며 두 가정의 격변이 예고되는 상황을 그려낸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아시아계 증오 범죄 뉴스가 잦은 요즘,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됩니다. 관습적으로 뿌리 깊게 박힌 차별. 가짜 평화 역시 결국 오랜 분노 앞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인종 혐오 범죄에 깃든 암울한 비극을 담은 LA 타임스 도서상 수상작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의도적 눈감기가 만연한 역사를 들추고 회피하지 않는 스테프 차 작가의 걸작 범죄 스릴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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