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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년
이인화 지음 / 스토리프렌즈 / 2021년 2월
평점 :
100만 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 <영원한 제국>의 이인화 작가의 신작이 출간되었습니다. 정조의 독살설을 소재로 한 <영원한 제국>에 이어 이번엔 세종이 만든 한글을 소재로 스릴감 넘치는 시간여행을 하는 <2061년>.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먼치킨 임금 두 분을 모두 다룬 셈이라 시리즈로 채워지는 느낌이어서 좋네요. <영원한 제국>에 푹 빠져본 독자, 팩트를 바탕으로 한 픽션 소설 좋아하는 독자라면 <2061년> 놓치지 마세요.
2061년.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은 인간과 기계의 결혼으로 태어난 혼종입니다. 인공지능을 관리할 수 있는 특별한 인공지능을 갖춘 호모 마키나가 대통령이 된 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기나긴 세월이 필요하진 않았습니다.
지구온난화, 생태계 파괴, 공장형 가축 사육 등으로 고위험 전염병 바이러스가 진화했고 주기적인 팬데믹에 휩쓸린 지구. 코로나 45 이후 결국 대분열 시대가 왔습니다. 내전의 시대였고, 각종 이익이 얽히고설켜 한국이 핵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 61 응급상황입니다.
뉴욕 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익. 23년 동안 1896년의 제물포를 연구했던 초공간 역사학과 대학교수였습니다. 인간의 의식을 다른 인간의 뇌로 전송하는 기술이 성공하면서 2030년대 말 초보적인 시간여행이 가능해졌습니다. 시공의 균열이 있는 시간대라면 과거로 갈 수 있게 된 겁니다. 이들은 탐사자라고 부릅니다. 과거 누군가의 몸을 빌려 단순히 현장을 목격하는 것을 넘어 숙주의 의식을 묶어두고 탐사자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재익은 탐사자로서 1896년의 제물포로 시간여행을 하다 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역적 이완용에게 총을 쏜 사건 때문에 시공간 보호법 위반으로 수감 중입니다. 그런데 2061년 인류 멸망을 야기할 치명적인 전염병 바이러스 창궐이 인공지능에 의해 예측된 상황. 이 바이러스와 가장 가까운 균주가 1896년 조선에 나타났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재익은 미국 대통령의 제안으로 다시 조선으로 떠나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정보 그 자체가 아닌 정보를 말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인공지능. 수많은 언어들 중 이도 문자로 인공지능은 발화성을 증명했습니다. 이도 문자는 세종 이도가 1443년 발명한 문자입니다. 우리의 한글이 어떻게 기계어를 아우르게 되는지 그 과정이 무척 흥미진진하게 묘사됩니다. 미국에선 공공건물의 로마자 사용 금지가 내려졌고, 이도 문자 전용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서문에 담긴 휴머니즘을 계승하는 미국 대통령이 이도 우파라면, 본문과 후서에 담긴 인간 확장의 보편주의를 계승한 이도 좌파도 있습니다. 방역과 경제를 함께 관리하는 강력한 국제기구인 국제방역연합은 '이도의 무지개'라는 완전 방역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연방정부 전복을 목표로 하는 반이도파 단체도 있습니다.
1896년 제물포, 이도 우파와 좌파 그리고 반이도파가 나타납니다. 이번엔 이들 모두 역사에 개입하려고 작정한 상태입니다. 이들이 숨어든 1896년의 인물들은 경무관, 간호사 등 당시 전염성 바이러스로 사망한 영국인 사건에 얽힌 주변인물들입니다.
바이러스 전염의 매개가 되는 모든 생태계의 소리를 이도 문자로 받아 적어 완벽한 위기 대응을 하려는 이도의 무지개 시스템은 이도 문자의 해설인 훈민정음해례본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사라지는 방역 독재 시스템이기도 합니다. 소설 <2061년>은 이도 우파, 좌파, 반이도파가 훈민정음해례본을 없애거나 얻어야 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려나가고 있습니다.
1896년 제물포는 바이러스 균주를 얻을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1940년 간송 전형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에 훈민정음해례본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시공간대입니다. 팩트와 픽션의 조화가 예술입니다. 날탕패, 만인계 등 1896년의 조선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나라가 망해 허물어져 가는 분위기의 제물포는 음울하면서도 살아 있습니다.
2020년 10월에 기사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의 기침 소리만으로 코로나19 감염을 98.5 퍼센트 MIT AI 알고리즘의 성공. 소설 <2061년>에서처럼 박쥐와 같은 동물을 포함해 바이러스와 관련된 모든 소리를 감지하는 기술로의 확장, 가능할 법한 생각이 듭니다.
언어가 바뀌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가 바뀐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처럼 지구 생명체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되는 이도 문자의 힘, 짜릿한 전율을 일으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 민족말살정책을 당한 우리는 더욱 실감 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이 1940년에야 공개된 사연, 고려 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왕조가 바뀌는 가운데 일어났던 여진과의 관계, 한글 창제 이유의 숨겨진 비밀 등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1940년 안동이 아닌 1896년 제물포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었더라면 인간 집단 지성의 도약 시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SF 상상을 얹은 팩션 소설. 디스토피아를 그린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이인화 작가의 <2061년>의 빅브라더는 어떤 모습인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팬데믹과 인공지능이라는 이 시대 키워드와 역사적 소재가 어우러지니 대작 아우라를 뿜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