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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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고 상 8회, 네뷸러 상 6회, 로커스 상 24회...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어스시의 마법사>로 SF 판타지 거장이 된 어슐러 르 귄 작가. 2018년 88세의 나이로 영면한 작가의 산문집은 작가의 삶과 문학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모여있어 반갑습니다.


반려 고양이 파드의 집사이기도 한 어슐러 르 귄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는 노년 시기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는 조금 더 책에 집중한 글들이 모였습니다. 2000년~2016년 강연과 미공개 에세이, 책 서문과 작가들에 대한 글 그리고 작가가 좋아하는 작품의 서평들을 모은 산문집입니다.


미국 중산층 지식인이자 아내, 주부, 세 아이의 엄마이면서 작가였던 어슐러 르 귄. '장르'와 '여성작가'에 대한 문학계의 편견에 일침 놓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다양한 행사에서 다양한 청중들을 상대로 내놓은 조각 글들을 다듬어 연대순으로 배열한 이야기는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결같았던 어슐러 르 귄의 장르관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인류가 가진 가장 유용한 도구인 '상상력'. 정신의 필수 도구이며, 도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문학 읽기입니다. 문해력을 높이려면 문학이야말로 사용 설명서라고 합니다.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매뉴얼,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예요." - 책 속에서


그런데 이 문학이라는 게 참 편협한 세계이기도 합니다. 판타지를 아동물이나 쓰레기로 폄하했던 과거에는 '장르'는 열등 계급으로 매겼습니다. 이제는 무너지고 있다지만, 독자로서 여전히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로맨스 소설, 장르 소설 카테고리에 들어가면 일명 명작 고전 소설들을 만나기 힘듭니다.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서 눈길을 끄는 글이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SF 쓰는 방법 배우기라는 제목의 이 글은 아주 색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극적으로 살려 낸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정확하고 구체적이고 자세한 묘사로 대단히 SF적인 글이라고 평가하니, 열린 시각으로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장르로 문학을 판단하지 말지어다! 어슐러 르 귄은 평생 이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책에 붙은 장르 꼬리표에 일침을 가합니다. 소설이란 쓸 때나 읽을 때나 상상력의 행위라고 합니다. 판타지는 가장 오래된 서사 방식이며, 가장 보편적인 서사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판타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정신적 재현"을 만들어 내어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으며 어디로 갈 수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가질 수 있으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작가들의 책에 서문으로 쓴 글 모음도 소개됩니다. 어슐러 르 귄이 어떤 소설을 좋아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H. G. 웰스의 책은 세 권이나 서문을 썼는데, 버지니아 울프 서문은 요청 없더라는 장르 작가에 대한 출판계와 문학계의 비꼼도 슬쩍 흘려놓습니다.


퓰리처상 수상가이지만 문학계에서 무시당한 H. L. 데이비스의 『뿔 속의 꿀』 책처럼 재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글도 많습니다. 조지 맥도널드의 동화책 『공주와 고블린』의 서문도 인상적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썼지만, 아이들을 낮춰 보지는 않았던 작가라고 합니다.


본다 매킨타이어의 『드림스네이크』처럼 현지에서도 절판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땐 저도 가슴 아플 정도였어요. 어슐러 르 귄에게 큰 영향을 준 SF라니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국내 번역이 안 된 책들도 많이 언급되어 있어 갈증이 심해집니다. 그러고 보면 책 제목이... 결국 독자가 내뱉을 만한 말이기도 하네요.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노벨상 수상자 주제 사라마구 작가의 책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쉼표밖에 없어서 분개하며 읽기 시작했다가, 결국 그의 다른 책까지 모두 읽을 정도로 푹 빠지게 되었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1세기가 더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명작으로 출간되고 있는 H. G. 웰스의 책들은 세 권이나 서문을 쓸 정도로 인연이 있습니다. 마침 저도 펭귄클래식 버전의 『타임머신』을 읽으려는 중이어서 작품관에 대한 배경 이야기가 도움 되었습니다.


어슐러 르 귄이 쓴 서평은 대부분 <맨체스터 가디언>에 실리기도 했는데, 작가 순으로 이 책에 소개해두고 있습니다. SF 소설이지만 SF로 불리길 원하지 않는 작가들을 이야기할 땐 씁쓸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1994년 여성 작가들만의 칩거처인 '헤지브룩'에서 보낸 일주일의 일기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숲속에 위치한 헤지브룩에서의 일상은 소로의 글을 읽는 듯 맑은 자연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아니 그보다는 베아트릭스 포터의 동화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아주 조직적인 야생 토끼들이 자주 등장해 익살맞습니다.


문학 소설을 장르소설과 대립시키는 자들은 어슐러 르 귄과 토론하면 깨갱할 법 합니다. 그 열등한 장르를 제대로 읽어는 봤는지 꼬집기도 합니다. 그 작품의 전통이 뭔지, 그 작품이 어디에서 왔는지, 뭘 하려고 하는지, 뭘 하는지 알려줄 맥락 정보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말입니다. 작품의 질은 다른 데서 찾으라고 호통칩니다.


어떤 장르가 다른 모든 장르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을 부숴버리는 작가입니다. SF 판타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를 읽으며 "믿쑵니다!" 후련해지는 기분도 만끽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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