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 - 정신과 전문의가 들려주는 트라우마의 모든 것
김준기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트라우마는 재해급 충격을 받았을 때에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일상으로 파고든 트라우마인 만큼 우리는 이미 영화에서 만나고 있었습니다. 트라우마 전문가 김준기 정신과의사의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은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마음의 상처에 주목합니다. 트라우마 증상부터 치유 과정까지 잘 보여줄 수 있는 25편 영화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들, 트라우마를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책입니다.


트라우마는 표현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눈치채기 쉽지 않고, 스스로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그저 성격 문제로 치부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오해와 갈등이 일어나면서 악순환의 반복이 됩니다. 트라우마는 어디에나 있지만 트라우마를 치유할 힘도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으로 트라우마의 정체와 회복 과정을 만나보세요.


25편의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부터 전쟁, SF, 독립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엄선한 멋진 영화들입니다. 영상미에 집중했던 저와는 달리 트라우마 전문가답게 직업병을 발휘한 김준기 정신과의사의 트라우마 해설이 돋보였습니다. 전쟁 트라우마, 스몰&빅 트라우마, 아동기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트라우마 회복 과정을 설명해 주니 같은 영화를 본 것인가 싶을 정도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탐사 저널리스트의 본질에 포인트를 맞춰 봤던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저자는 트라우마 기억에 초점 맞춰 들려줍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실제로 일어났었던 보스턴 지역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폭행 사건을 미국 일간지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 취재팀 기자들이 폭로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10년~30년 전의 어린 시절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가가 쟁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기억은 받아들이기 편한 쪽으로 변화하니까요.


하지만 트라우마 기억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어떤 경우엔 시간이 더할수록 더 또렷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뇌 시스템이 과부하에 걸려 기억을 가공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관해서는 과학적 입증이 아직 없기에 실제 재판에서도 피해자 진술 중 반 이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고 해요.





트라우마 당시의 정보와 에너지를 그대로 담은 상태로 억제되어 있다가 뭔가에 자극받으면 당시 기억정보가 생생하게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결국 트라우마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으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고통도 임계치를 넘어서면 멍해지고 오히려 기억이 나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방어기제로 기억을 해리시켜버리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억눌려져 있을 뿐입니다.


해리는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해리라는 용어는 한 번쯤 들어봤을 거예요. 우리는 인격전환이 드라마틱 하게 일어나는 다중인격만을 해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의외로 폭넓은 개념이었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다중인격 해리는 3차 해리라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하려는 인격과 과거의 트라우마 기억을 담고 있는 인격이 서로 통합되지 않고 분리되는 해리. 위협으로부터 오직 살아남으라는 긴박한 신호인 트라우마 기억의 정체를 이해하게 되면 안타까움이 솟구칩니다. 트라우마 치료는 그 기억에 접근해 끄집어내고, 그 기억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견뎌내 기억을 다시 변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쯤 되니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제대로 와닿습니다.


트라우마의 치유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트라우마 이후의 삶이 정반대로 갈라진 조커와 배트맨의 이야기 <다크 나이트>, 트라우마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거식증을 앓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투 더 본>, 실제 일어난 아동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 등 트라우마 종류와 증상을 보여주는 영화들을 통해 우리 내면의 상처들을 만나봅니다.


특히 자존감을 잃게 하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사건으로 생기는 스몰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와 아동기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는 눈시울을 붉힐 정도로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같은 사건을 경험했어도 피해자를 둘러싼 주변 환경이 다르기에 각기 다른 반응이 나온다는 걸 이해하게 되면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계속해서 미치는 트라우마의 고통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변화는 영화에서처럼 단 몇 분 사이에 드라마틱한 치유가 일어나진 않지만, 관계 속에서 치유가 일어난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트라우마 회복에 중요한 열쇠를 짚어주는 <영화로 만나는 트라우마 심리학>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