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나이프 - 왼팔과 사랑에 빠진 남자
하야시 고지 지음, 김현화 옮김 / 오렌지디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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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부작으로 방영된 일본 드라마 <톱 나이프 : 천재 뇌외과의의 조건>의 원작소설 <톱 나이프>. 부제는 '왼팔과 사랑에 빠진 남자'인데 책 속 에피소드와 연관된 내용이라 읽기 전에는 어떤 의미인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의술 위주의 의학 소설 좋아하는 독자라면 <톱 나이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뇌 신경외과의 네 명과 환자들과의 에피소드를 다룹니다.


불과 0.1밀리미터의 오차가, 0.1초의 망설임이, 0.1그램의 오만함이 환자를 재기 불가능하게 만드는 뇌신경외과 전문의. 우주가 만들어낸 가장 복잡한 창조물인 사람의 뇌를 손대는 의사들의 압박감이 어마어마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인 '톱 나이프'는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의에게 주어지는 상 이름입니다. 이 소설에는 '톱 나이프'에 이미 도달한 의사와 정점을 향해 정진하는 신경외과 전문의들이 등장합니다.


"신경외과에서 이루어지는 수술은 토목공사처럼 시작된다." - 첫 문장


망치와 정을 사용해 목재를 조각하는 듯한 역동적인 느낌과 숙련된 시계 장인처럼 섬세한 느낌을 모두 자아내는 뇌 수술. 도토 종합병원 신경외과 차장 미야마의 수술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뇌 수술 장면 묘사를 읽으며 의사 출신 소설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전문적인 분야를 그려나가는 데 강점을 드러내는 하야시 고지 작가. 소설의 리얼한 묘사를 위해 얼마나 꼼꼼히 취재했을까요.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일본 최정상급 배우들이 출연할 정도라니 믿고 보는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지천명을 맞이한 돌싱 미야마 요코는 평생을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데 쏟아부었습니다. 아이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던 미야마는 이혼 후 혼자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빠와 함께 살던 딸아이가 가출을 해버리는 바람에 며칠간 딸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마음이 심란합니다.


한편 외상으로 수술 후 회복이 빨라 퇴원을 앞둔 14살 소년에게 갑자기 이상한 병세가 나타납니다. 엄마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꼭 거짓말하는 것처럼 어이없는 증세처럼 보이지만 실제 카프그라 증후군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평소 아들의 게임중독증을 의심한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던 모자 관계 때문일까요. 다른 사람은 정확히 구별하면서도 유독 엄마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환자와 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미야마는 자신의 처지를 냉철하게 되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딸과 며칠 지내면서 이제는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앞으로는 딸을 직접 보살피려고 마음먹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자만심이란 걸 냉정하게 깨닫습니다. 누군가 때문에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는 게 가장 스트레스로 받아들이는 미야마의 성격상 당장의 동정심과 자만심이 오래가지는 못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기도 합니다.


경이로운 공간 인지 능력과 풍부한 경험 덕분에 신의 테크닉이라 불리며 일본 최초로 '톱 나이프' 상을 수상한 신경외과의 황제, 구로이와 겐고 에피소드도 흥미진진합니다. 50대에 화려한 독신 생활을 하는 그에게 "동맥류가 파열되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듯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 생깁니다. 비정한 캐릭터인 구로이와에게 이런 굴욕은 처음이야!를 선사한 건 다름 아닌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들.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아이라니. 아이 엄마는 아이를 다짜고짜 맡기고는 사라져버립니다. 아이라면 질색인 그는 어떻게 대처할까요.


30대 젊은 천재로 불리는 신경외과 전문의 니시고오리 다쿠마는 아직은 위태로운 비정한 캐릭터입니다. 미지의 병에 도전하는 건 두렵고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지만 하지 않으면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기에 압박감을 헤쳐가며 의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내기 의사 고즈쿠에 사치코는 어설픈 피부절개, 엉망진창 큐렛 사용법, 겁 많아 피가 튀면 비명 지르기 일쑤여서 매일 혼나는 캐릭터입니다. 칭찬만 받으며 살아왔고, 성적으로 선택한 의사의 길이기에 아직은 이 길이 진짜 내 길인지 헷갈립니다. 신경외과에 지원한 것조차 뇌를 사랑 타령과 엮어 이야기한 선배 의사의 꾐에 빠져 선택한 거였습니다. 감정이니 마음이니 하는 건 그저 전기적인 거라고 당연시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타인에 대한 공감이 어떻게 뇌와 연결되는지 조금씩 이해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미야마, 구로이와, 니시고, 고즈쿠에 네 명의 뇌 신경외과 의사들은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정을 누리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어 짠하더라고요. 미야마와 구로이와는 전 남편과 사는 딸과 갑자기 생긴 아들과의 생활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되지만, 반전이라면 반전이 또 기다리고 있으니 뻔한 스토리는 아니었어요.


<톱 나이프>는 의학 소설인 만큼 뭐니 뭐니 해도 환자들의 긴장감 넘치는 관계가 볼만합니다. 엄마는 외계인이라고 주장한 카프그라 증후군 외에도 '나는 이미 죽었다.'고 착각하는 뇌 기능 장애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드문 질환이라는 코타르 증후군입니다. 한 번이라도 들은 곡을 순식간에 무의식적으로 재현하는 후천적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여자의 이야기, 자신의 왼팔을 아름다운 젊은 여자로 착각하는 외계인 손 증후군을 앓는 남자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들의 증세는 그냥 나타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비밀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애잔한 감정에 공감하게 됩니다.


비정해 보이는 의사들도 저마다 아픔을 끌어안고 있고,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톱 나이프>. 뇌라는 신의 영역에 뛰어든 천재 의사들의 마음 성장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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