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물리학 -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에서 양자과학 시대 위상물질까지
한정훈 지음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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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물질은 양자 물질이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쓰인 책 <물질의 물리학>. 양자라는 개념이 들어가면 뭔가 어렵고 낯설게 느껴져요. 이 책은 전문가들끼리 하는 말만으로는 헤매기 일쑤지만, 과학에 관심은 있는 일반인들을 위해 친절히 풀어쓴 책입니다.


2016년 노벨물리학상의 수상 업적은 '위상 물리학 이론'이었습니다. 수상자 중 한 명인 데이비드 사울레스를 지도교수로 뒀던 경험이 있는 한정훈 저자는 당시 대중에게 이 개념을 소개하는 일이 무척 어려웠었다고 토로하는데요. 30여 년의 연구 경험과 수년간의 대중강연과 글쓰기 경험을 아울러 과학적 배경이 탄탄한 독자가 아니어도 읽을 수 있는 <물질의 물리학>을 선보입니다.


우주에는 100여 종의 원자가 있고 주기율표에 이름을 올린 바로 그것들입니다. 일상생활의 뿌리이자 뼈대인 원자. 그 원자를 설명하는 게 양자역학입니다.


물질이란 무엇일까요. 저자는 물질이란 용어가 물리학적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주기율표처럼 물질 명부라는 건 없습니다. 원자의 조합으로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지니까요. 왜 원자는 서로 뭉쳐 물질을 만들까요. 왜 어떤 물질은 자석이 될까요. 왜 어떤 물질은 금속이어서 전기를 통하고 다른 물질은 그러지 못할까요. 이 모든 것을 양자역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의 물질 이론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엉뚱한 결론을 내놓은 셈이지만 사유의 과정과 방법론은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원자라는 이름을 명명한 데모크리토스, 고대 그리스의 4원소설 이후 2천 년 넘게 발전이 없다가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의 발견과 함께 몇 년 사이에 제대로 된 물질 이론이 하나씩 만들어졌습니다. 과학적 실험 도구와 수학적 언어가 발전하면서 일궈낸 여정을 주요 물리학자의 업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하나의 입자인 줄로만 알았던 원자가 사실은 양성자, 중성자, 전자라는 세 가지 기본 입자를 조합해 만든 복합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래로 원자의 구조를 지배하는 법칙인 양자역학의 원리를 충실히 다룹니다. 현대적 원자 모델을 완성하는 과정이 꽤 흥미진진합니다. 한정훈 교수의 문체는 문과적 느낌이 폴폴 풍기면서 방정식 풀이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19세기 중반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분광학의 결과물이 19세기 후반 원자의 비밀을 풀어내는 열쇠인 양자역학의 탄생을 견인했고, 여기서 오너스의 절대 냉장고는 이후 힉스 입자까지도 발견할 수 있도록 단서를 제공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질의 물리학>은 쉬운 이해를 위해 비유를 사용합니다. 특히 전자의 특이한 배타성을 설명하는데 쓰인 파울리 호텔 비유는 멋지더라고요. 어떤 방이든 각 방에는 남자도 한 명, 여자도 한 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는 파울리 호텔. 남자끼리는 방을 바꿔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규칙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일종의 파울리 호텔인 겁니다.


재미있는 건 전자는 게으르다는 거예요. 1층에 있는 방부터 서로 차지한다고 합니다. 어떤 물질이든 자신의 에너지를 최소화한 상태가 가장 안정적인 상태라고 하는 물리학 법칙의 일부가 전자의 게으름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2층은 꽉 찼지만 3층은 절반만 찼다면 유동성이 생겨 그게 바로 금속이 되는 거라고 합니다. 이 방식으로 부도체와 도체를 분류해봅니다. 만약 자유로운 혼거를 허용했다면 이 세상에 절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물질세계의 질서는 정말 심오합니다.


호텔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건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운영방식은 194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파울리의 배타원리. 명쾌하게 이해되는 파울리 호텔 비유는 이후 책에서 쭉 이어지니 잘 기억해둬야 합니다.


빛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빛도 물질일까요? 입자, 알갱이와 결부될 만한 성질만 생각하고는 빛은 물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쉽지만 빛도 입자입니다. 이걸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양자역학 이론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양자라는 건 물건의 개수를 세듯 빛이 품고 있는 에너지의 양을 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뉴런의 프리즘, 맥스웰의 대발견,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공식, 슈뢰딩거의 방정식 탄생까지 이어집니다. 빛은 양자화된 에너지 덩어리라는 개념이 과학의 보편적 상식이 되어가는 여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자계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파울리 호텔의 비유로 설명할 때만 해도 이해는 잘 된 편인데요. 위상수학과 양자 물질의 만남으로 대도약을 이뤄 위상 물질 시대에 이른 최근 물리학 이론은 여전히 어렵게 다가오긴 합니다. 은연중에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3차원적인 물질만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눈으로 볼 수 없는 전자 세계를 연구한다는 것,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면 이 책은 꼭 읽어보세요. 1차원 물질 나노튜브, 2차원 탄소물질 그래핀에 이어 한정훈 저자의 주요 연구 분야인 스커미온 이론, 양자 스핀계 이론 등 앞으로 더욱 가치 높아질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하드 드라이브가 땅콩 크기만 해진다면 스커미온을 발견한 연구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거라고 하는데, 그날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응집물질물리학을 소개하는 최초의 교양서 <물질의 물리학>. 알쏭달쏭한 위상 물질에 대한 이야기까지 속시원히 다루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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