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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 특별 합본판 ㅣ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21세기의 시작을 신화 읽기 붐으로 만든 화제의 책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0주년을 맞이하여 특별합본판이 나왔습니다. 어마어마한 포스를 자랑하는 벽돌책이지요. 아우라가 번쩍번쩍!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책으로만 접했거나 이제 기억이 가물거리는 수준이라면 신화 읽기의 즐거움을 새롭게 선사하는 책이 될 겁니다.
"독자는 지금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하라. 일단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기 바란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9세기 미국 작가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로마신화도 인용되기도 하면서 대부분 로마시대 때 집대성된 작품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핀치의 책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저도 이미 읽어봤지만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신선한 의미로 충격적이었어요. 이렇게 이해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한국적인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당당히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국한하지 않고 한국 설화 및 다른 나라의 신화로 확장하며 이야기의 꼬리를 무는 형식은 신화 읽기의 새로운 방식을 선보여준 셈입니다.
신화는 그 의미를 읽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화 이해와 해석에 필요한 열두 개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미궁과도 같은 신화를 어떻게 읽으면 되는지 길잡이가 됩니다.
단행본 1권에 해당하는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편의 첫 이야기부터 인상 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리스 세계관과 우주관을 소개하지요. 올륌포스 신들이 본격 등장하기 전인 티탄 신들과의 전쟁이 소개되고, 이어 올륌포스 열두 신이 등장하는 수순인데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그보다 앞서 신발 이야기부터 등장합니다.
왜 신발 이야기일까요. 신화에는 시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영웅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노파로 변신한 헤라 여신을 업고 개울을 건너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이아손의 이야기, 미궁 속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영웅인 테세우스의 신분 증명이 된 가죽신처럼요. 재미있는 건 다른 나라 신화와 설화에서도 신발과 관련한 이야기가 참 많다는 거였어요. 소림사 권법을 창안한 달마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콩쥐팥쥐의 꽃신 한 짝처럼요.
이력서라는 뜻이 신발을 끌고 온 역사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이번에 알았어요. 우리는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잃은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닌지 저자는 묻습니다. "신화는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인지도 모른다."는 말로 신화 읽기의 의미를 짚어보게 합니다. 신화를 이해하는 열쇠는 이 책에서 차근차근 알려주니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기만 하면 됩니다.
"신화를 아는 일은 인간을 미리 아는 일이다. 신화가 인간 이해의 열쇠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권에 해당하는 '사랑의 테마로 읽는 신화의 12가지 열쇠' 편은 온갖 유형의 사랑이 등장합니다. 익히 알듯 제우스는 별짓을 다 하면서 바람기를 풀풀 날렸는데 이처럼 신화 속 등장인물들의 사랑은 도덕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 못한 때가 수두룩합니다.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만 그런 건 아니었어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동서양 막론하고 비슷한 스토리를 끌어오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번 사랑 테마에서도 고구려 왕 유리와 유리의 손자 호동왕자에게 일어났던 일을 함께 소개하며 신화 속 사랑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라 피비린내 나고 패륜적 사랑도 부지기수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극으로 승화한 사랑도 있습니다. 부적절한 욕망의 화신 파시파에의 이야기는 테세우스, 이카로스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네버엔딩 스토리처럼 희비극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동성인 아버지를 미워하고 이성인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려는 복잡한 마음 상태를 일컫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 반대의 상태인 엘렉트라 콤플렉스, 물에 비친 제 모습에 넋을 잃고 잃어버린 반쪽이를 자기 자신에서 찾는 나르키쏘스처럼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반쪽을 찾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됩니다. 사랑과 관련해서는 어린이들이 읽기 부적절한 내용이 많지 않냐는 의문이 나올 수 있지만, 혼란스러운 카오스가 질서의 코스모스로 자리 잡히는 과정이 필요하듯 이를 통해 오히려 신화 읽기의 필요성을 저자는 강조하기도 합니다.
"꿈은 개인의 신화요, 신화는 집단의 꿈"이라는 말처럼 신들은 당대를 살던 사람들의 보편적인 꿈과 진실을 반영합니다. 신화 속에서 인간의 삶을 꿰뚫는 진리가 툭툭 튀어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3권에 해당하는 '신들의 마음을 아는 12가지 열쇠'편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이야기들이 특히 많이 소개되었어요. 신화는 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 세상을 두고 싸우는 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영생불사의 신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기에 신화는 힘을 가집니다. 인간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내리면서도 벌을 주기도 하는 신. 신들이 좋아하는 인간, 싫어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개됩니다.
2천여 년 전 로마에서 활동하던 시인 오비디우스가 받아 적은 퓌그말리온 이야기는 20세기 초 조지 버나드 쇼에 의해 희곡으로, 이후 뮤지컬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확장될 정도로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믿음 때문에 조각상이 사람으로 바뀌는 이 이야기는 신들의 축복을 받은 대표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반대도 있습니다. 신들을 비아냥거리다 화를 당한 니오베 이야기처럼 거짓말과 오만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아폴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들은 너희 인간이 무릎을 꿇을 때만 자비롭다. 다른 신들이 정의롭지 못할 때만 정의롭다."라고 말이지요. 신들과 겨루다 패가망신한 다양한 군상을 들려줍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는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이윤기 저자 특유의 꼬리에 꼬리물기는 계속 펼쳐집니다. 티탄에 속하는 신이지만 인간의 편에 선 프로메테우스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흙으로 최초로 인간을 빚은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이즈음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 형제에게 판도라를 만들어 보냈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는바와 같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받게 되는데 그를 구해준 이가 바로 헤라클레스입니다. 헤라클레스 이야기는 4편에 이어집니다.
헤라클레스 석상이 많은 만큼 예술가들의 상상력의 영감이 된 헤라클레스 이야기. 이윤기 저자의 재미있는 여행 에피소드까지 더해져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천하장사죠. 몽둥이를 들고 어깨에는 사자 가죽을 두른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힘, 인내, 가치, 정의 덕목을 상징하는 헤라클레스는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로마 황제 코모두스, 루이 14세 등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들에게 헤라클레스 따라 하기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제우스와 인간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힘센 영웅 헤라클레스. 제우스의 바람기가 낳은 결과는 순탄한 인생 살이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제우스의 바람기는 악명 높을 정도인데 헤라클레스를 두고도 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세상을 위해 할 일은 하고많은데 뚜렷한 직분을 가지고 인간을 도와줄 신들의 수, 인간 세상에서 날뛰는 무수한 괴물을 잡아 죽일 영웅의 수는 턱없이 모자라지 않소? 이러는 나도 좀 피곤하오."라니. 어쨌든 헤라 여신은 남편의 자식들이 꼴 보기 싫습니다. 헤라클레스도 모진 고초를 겪습니다.
영웅의 길은 험난한 법. 태어난 지 여덟 달쯤 되었을 때 팔뚝만 한 뱀 두 마리가 나타났는데 손힘으로 죽여버립니다. 맨손으로 사자도 잡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처자식을 죽이는 사건이 터지면서 죄를 닦기 위해 아르고스 땅으로 가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아르고스의 지배자로부터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지시를 받는데 그게 바로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입니다.
네메아의 사자, 휘드라 물뱀, 뿔 달린 암사슴, 멧돼지 정도는 기본이고 소똥 치우기, 새 떼 없애기 등 당시 골치 아픈 일들을 모조리 해결하는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헤라 여신마저도 감탄하게 하며 신이 된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는 스텍타클한 사건의 연속입니다. 온갖 풍파를 겪지만 결국 그 고초가 끝나면 영광을 얻게 된다는 전형적인 영웅담입니다. 12가지 과업을 행하는 여정에서 여러 신들과 영웅들과의 인연도 생기는데 잠시 몸담았던 아르고 원정대에 관한 이야기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권에 해당하는 파트에서 등장합니다.
아르고 원정대 이야기도 무척 유명합니다. 숙부의 계략에 머나먼 땅으로 금양모피를 구하러 가야 하는 이아손. 배도 만들고 함께 할 영웅들도 모셔옵니다. 당시 내로라하는 영웅들이 원정대원이었어요.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 등 개개인의 이야기가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존재감이 대단한 능력자들입니다. 얼마나 대단한지 헬라스 여러 도시국가 백성들은 저마다 제 조상이 원정대원이었다고 주장했다는군요.
금양모피를 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무척 많지만 저자는 이아손의 모노산달로스에 다시 한 번 더 집중합니다. 숙부에게 왕권을 뺏긴 채 몸 사리고 있던 이아손이 돌아오면서 생긴 에피소드는 이 책의 첫 이야기로 등장했습니다.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고행을 통해 결국 금양모피로 되찾은 이아손의 모험을 통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넘어서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작이 되어버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편을 읽고 나니 아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이윤기 저자의 필터링을 거친 신화 읽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1권에서 저자가 당부한 것처럼 우리는 신화라는 이름의 자전거 페달을 계속 밟아가야 합니다. 신화 속 사랑관, 여성관은 여전히 참 맘에 안 들지만, 나만의 상상력을 동원하며 신화를 이해하는 열쇠를 하나씩 더 찾아나가고 싶습니다.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로 바라보게 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컬러 도판, 유적지의 현장 사진이 함께해 더욱 생생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고대의 고전학자들이 짜놓은 틀 안에서 상상력으로 신화를 복원한 소설가의 이야기책이다."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