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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 당신은 끝에 서 보았는가?
윤정 지음 / 북보자기 / 2020년 3월
평점 :
정신분석치료를 하고 정신분석상담가와 태교상담가를 양성하는 교육을 하는 시인이자 정신분석상담가 윤정 저자의 책 <끝>. 한 음절만으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단어 '끝',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기대됩니다.
시간, 장소, 순간 그리고 사람처럼 끝없이 사라지는 존재에 아름다운 고민을 하는 인간. <끝>은 길을 잃고 헤매는 정체 상태에서 불안의 정체 즉, 자아의 부재를 알아차리게끔 합니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외적, 내적 갈등으로 빚어지는 고통과 고민을 사유하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조금 늦으면 조용히 기다림을 수용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격렬한 언쟁을 불러오기도 하는 '기다림'. 자신이 버려지는 고뇌를 통해 짧은 순간 자신의 부재를 가치 없는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존재박탈의 부재에 이르기도 합니다. 고뇌의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여정을 통해 하찮은 것이다가도 아주 비장해지기까지도 하는 '기다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숙명적인 의존성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런 기다림은 늘 삶에 있어 패자라고 단언합니다.
기다림 외에도 부재, 긍정, 고뇌, 비밀, 접촉, 총족, 연민, 대화, 헌신, 외로움, 진실 등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몸짓, 말, 행동을 곰곰이 돌이키고 현상을 직시하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됩니다.
익숙하게 해 온 내 사유 방식을 저자의 사유 흐름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고뇌조차도 피곤한 일이라는 걸 저자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 나와 삶 사이에 고뇌가 투명 유리처럼 막을 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말이죠. 그럼에도 고뇌의 삶이 필요한 이유를 들려주고, 고뇌를 통해 용기를 갖게 하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고뇌의 삶을 생명으로 바라보려면 자신의 상실로 버려진 자아에게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신을 향해 고통스러운 괴로움만큼 사랑하는 자신을 외롭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삶을 볼 수 있다면, 자아는 대상을 향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만큼 다가설 수 있는 사랑을 깨닫게 된다." - 끝
윤정 저자는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유지의 능동성을 찾아 나서고, 그게 생명의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불안의 고뇌에 빠져 삽니다. 상상한 대로 살지 못하고, 생각대로 살 수 없어 평생 동안 갈등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끝>은 공갈과 협박 속으로 스스로 몰아넣는 대신 풍부한 사색을 제안합니다. 사물의 세계를 통과하며 나아가는 인간의 의식, 그 과정에서 느낌이 결국 삶의 내용이라며 말이죠. 풍부한 사색의 삶이야말로 더 치열한 것이고, 그곳에서 충족의 삶을 건져낼 수 있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멘붕을 겪는다는 건, 모든 상상의 논리가 무너진 지각의 붕괴 상태를 의미합니다. 문제의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 스스로 주체를 가진 의식의 자아를 잃어버린 이들, 무기력한 자아를 가진 탓에 상상의 도피처로 도망가는 것조차 깨진 이들이 읽으면 도움 될 겁니다.
끝은 끝이 아니라 끝없는 것이라는 윤정 저자의 말이 인상 깊습니다. 죽음과 사라짐은 시작과 끝이 아니라고 합니다. 끝없는 끝의 진정한 의미를 통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에세이로 포문을 열고 정신분석적 성찰을 거쳐, 시적 언어로 표현하는 세 단계 구성을 통해 새로운 사유체계를 보여준 <끝>. 진정한 충족의 삶이란 무엇인지 담담하게 들려주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