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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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의 해후를 앞둔 첫사랑을 소재로 한 소설 <먼 바다>.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 이야기는 뻔한 클리셰 범벅? <먼 바다>는 젊은 날의 추억을 기억하는 과정에 초점 맞춘 스토리여서 색다른 느낌으로 읽히더라고요.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헤엄치는 '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미호'. 40년 전의 일이 떠오르는, 현재 미호의 기억입니다. 뉴욕에서 그를 만나는 날을 앞두고 추억을 떠올립니다.


그동안 미호는 싱글맘으로 딸을 키웠고, 그 딸은 현재 임신 중이어서 곧 할머니가 될 예정입니다. 그 역시 애가 넷이나 되는 가장으로 살아왔습니다. 서로의 길을 살아온 그들. 40년 전 어떤 사랑을 했고 헤어지고 잊혔는지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줍니다.


그들의 사랑에는 사회 배경과 가족의 스토리가 맞물려 있습니다. 성직자의 길을 걸을 예정이었던 '그'는 신학생 신분이었습니다. 미호는 독재 정권 시절 항거했던 아버지의 외로운 죽음을 안은 불행한 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열아홉 살과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각각의 사연이 얽혀 의도하지 않은 채 인생의 방향이 틀어지는 과정을 담담히 보여줍니다.


낯설고 불편하고 부담스럽지만, 뭉근한 통증 속에서 설렘을 동반하는 첫사랑. 첫사랑은 첫사랑의 추억으로만 남기라고 하지만, 미호와 그는 결국 만납니다.


미호는 그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첫사랑의 남자가 사라져버린 사춘기를 가진 미호는 40년 동안 그 질문을 품어왔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깊은 물속을 두려워하는 미호에게 '먼 바다'는 그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이자 망각의 장소입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게 다일까, 내가 잊은 것은 무엇일까...


"결국 추억이라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그 상대를 대했던 자기 자신의 옛 자세를 반추하는 것일까." - 먼 바다 



40년이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 것일까요. 40년은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이 광야에서 헤맨 시간입니다. 걸어서 사흘 길이었지만 40년 동안 약속의 땅에 다다르지 못했던 유대인들. 이집트에 살며 습관화되었던 것들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데 필요한 세월이 40년이라고, 40년은 망각의 시간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미호는 40년이 지나고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40년 전 그가 했던 말들의 의미를 묻고 싶었을 정도로 미호에게는 40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잊지 않고 품어 온 의문이 있습니다.


그토록 아팠던 첫사랑의 통증은 40년이란 세월 동안 사라진 게 아니라 숙성된 그리움과 아픔이었음을 보여준 <먼 바다>. 사랑의 씨앗은 두 사람이 싹 틔웠지만, 그 사랑이 유지되는 건 둘만의 관계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변의 사정이 얽혀들기 마련입니다. 그 과정에서 생긴 가족 갈등이 그들의 사랑과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 부분이 맘에 들었어요.


갱년기를 앞둔 시점이다 보니 어떤 포인트에서 울컥 먹먹해지는 감정이 훅 와닿더라고요. 곳곳에 인용된 시가 그들의 이야기를 뒷받쳐주고 있어 더욱 뭉클해집니다. 담담하게, 절제미 있는 감정선을 보여주고 있어 저는 마음에 들었던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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