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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매기 앤드루스.재니스 로마스 지음, 홍승원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3월
평점 :
여성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연구하는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저자가 영국 여성의 참정권 획득 100주년 기념으로 쓴 책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A HISTORY OF WOMEN IN 100 OBJECTS)>. 책에 소개된 100가지 물건들은 여성이 받은 억압, 여성의 영웅주의, 여성의 독창성, 여성의 기술과 전문성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 물건들을 나열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는 여성들의 경험 속에서 연대감을 발견할만한 맥락과 해석을 뽑아냅니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는 섹슈얼리티,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 여성의 삶을 바꾼 과학과 기술, 여성의 표현 방식, 정체성의 발견, 관념에 도전한 예술, 여성의 영향력과 관련된 다양한 물건들을 다룹니다.
여성의 자연스러운 신체 기능을 터부시하는 것들을 이야기할 땐 인류의 할머니라 일컫는 '루시의 뼈'를 통해 역사 속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져 온 여성들의 이야기는 '할머니'에 담긴 의미를 재조명함으로써 많은 여성들이 인류의 할머니로서 루시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었음 상기시킵니다.
종교적 관습, 여성들의 사적인 물건들, 모성애를 강조한 어머니 역할 등 여성의 신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것들은 읽다 보면 분노 게이지 상승은 기본입니다. 법적, 문화적 구속의 틀에 갇혀 여성 비하, 여성 폭력 등 역사적 시대마다 다양하지만 부정적인 관점으로 점철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물건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거였다는 걸 뒤늦게 자각하기도 합니다.
가정생활은 로맨스와 이상의 무덤이 되는 것일까요. 가정생활에서 여성의 지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잔소리꾼 굴레'는 사진을 보는 순간 오싹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억제합니다. 실제 1967년까지도 영국 형법에 남아있던 형벌이라고 합니다.
현대의 여성 혐오 표현과 이어지는 '굴레'는 여성을 통제하고 길들여져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킵니다.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등 현재에도 어떻게 여성들이 사회의 취약 계층이 되었는지 그 기원을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았습니다.
가정생활에 매달리는 여성의 삶에서 노동력을 절약하고 고된 가사에서 해방시킨 과학 기술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해방이라는 표현이 누구의 관점에서 나온 건지는 의문입니다. 두 저자들은 그 이면에 담긴 부작용까지 낱낱이 살펴봅니다.
패션 파트에서는 힘, 재미, 자율, 소통을 상징하는 옷을 통해 여성미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헤쳐 봅니다. 페미니즘에서 전형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코르셋을 포함해 베일, 히잡 등에서도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이야기 외에도 그 이면에 숨겨진 해석들을 새롭게 알게 될 겁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물건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제1차 세계대전의 러브레터는 여성의 역사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부유한 특권층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편지가 전쟁 기간 동안 연인과 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로 확장되면서 여성들의 연결고리 형성과 관련한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여성의 연대성과 자유를 상징하는 물건이 자전거라는 사실도 처음엔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요. 여성미 없는 자세라며 터부시했던 시대에 자전거를 타기 위해 갈라진 바지가 등장했고, 이어 바지를 입은 여성, 자전거로 알프스 횡단 등 새로운 여성 해방의 이미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낮은 임금, 한정적인 고용 조건의 불리한 상황에서 노동을 합니다. 현대에도 일과 육아 병행이 힘든데, 유급 노동 후 무급 가사의 이중고는 정말 뿌리 깊은 역사를 갖고 있죠. 그럼에도 임금이 제공하는 재정적 자립이 평등을 향한 여성의 투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니, 앞으로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집니다.
여성에 대한 사상, 태도, 편견은 문화 속에서 강화, 도전, 재창조된다고 합니다. 예술의 진보적인 공간에서 펼친 여성의 이야기들을 통해 관념에 도전하는 여성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야 안젤루의 삶이 특히 와닿았는데요. 자전적 소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는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홍승은 작가의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에서도 개인의 내밀한 서사가 가진 힘을 이야기했는데, 마야 안젤루의 이야기는 자전적 글쓰기가 가진 잠재력을 통해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응원하고 있습니다.
16세기 중세 시대를 훌쩍 넘은 19세기에도 여전히 마녀로 화형 당한 여성이 있었고, 2006년에 비로소 마녀 기소가 금지될 정도로 어딘가에선 비이성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세상입니다. 가사 의무와 모성애가 여성의 유일한 역할이라는 사회가 씌운 틀, 사회적 기대치가 옭아맨 흔적들을 보여주는 100가지 물건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성의 삶을 무엇이 어떻게 어째서 바꾸고, 형성하고, 재정립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100가지 물건. 그동안 여성의 역사라 하면 여성 인물에 초점 맞춘 책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마저도 드물었지만) 이 책은 억압과 투쟁, 연대와 해방을 담은 물건으로 할머니들에게서 이어져 온 여성들의 진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