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분의 일을 냅니다 - 사장이 열 명인 을지로 와인 바 '십분의일'의 유쾌한 업무 일지
이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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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인쇄소 골목에 와인바? 힙지로가 된 을지로는 겉으로만 보면 허름한 몰골에 아련한 정취를 고스란히 풍기면서도 내부는 핫한, 겉과 속이 다른 반전 가게들로 인기몰이 중입니다. 골목 구석구석에 카페, BAR 등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을지로를 찾는 이삼십 대들이 늘어났습니다. <십분의 일을 냅니다>를 쓴 이현우 저자 역시 을지로에서 3년 전 와인바를 시작해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유지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와인바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사장이 무려 열 명입니다. 이 인원은 조금씩 바뀌기도 합니다. 그들은 월급의 10퍼센트를 매달 내고, 수익은 정확히 n 분의 1로 분배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월급 많아서 많이 낸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게 아니라니! 수익을 열 명이나 나눠가지려면 도대체 얼마나 장사가 잘 돼야 하는 거야?'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괜찮다 싶은 시스템이지만 성공적으로 굴러간다니 그게 더 신기했어요.


을지로 와인바 '십분의 일'의 탄생 과정을 그린 <십분의 일을 냅니다>. 저자 이현우 씨는 열 명의 사장 중에서 와인바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장의 인건비로 멤버들이 정한 월급을 별도로 받고 있습니다. 월급 받는 자영업자입니다. 나머지 멤버들은 직장인, 프리랜서 등 다른 일을 하면서 십분의 일을 내고 n 분의 1을 배당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창업 시스템을 생각해냈을까요. 드라마 막내 피디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직장인의 삶을 살던 저자가 어떤 계기로 퇴사를 하고 새로운 여정에 발을 들이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큐 <최후의 제국>에 소개된 부족들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 '청년 아로파' 모임을 만들었는데, 아누타 섬 사람들이 섬 안에서 공존하는 핵심 정신을 아로파라고 부릅니다. <십분의 일을 냅니다>에서는 다 같이 벌고 수익을 똑같이 나누는 협동과 공생의 관계를 의미하는 아로파 개념을 현실에 실현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공간 계약, 인테리어 등 창업 과정은 여타의 작은 가게 창업 과정과 다를 점은 없습니다. 계약하기도 전에 건물주의 갑질도 겪어보고, 아이템은 무엇으로 할지 갈팡질팡, 부족한 자본금으로 셀프 인테리어를 하다 멘탈 나가고, 월세는 나가는데 수익 0원인 상태가 지속되고...


개개인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좋은 조직이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잖아요. 하지만 아로파 정신에 공감하는 멤버들만 모여있으니 큰 흔들림이 없는 것 같았어요. 확고한 가치관만큼은 지켜나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10명의 남자들이 만들어가는 공간, 십분의 일. 함께 공감하고 의논하며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공동작업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닌데. 꿈도 다 다르고 취향도 다른 열 명이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무언가 새로운 일에 뛰어들고 싶다는 욕구는 같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차츰 여기저기에 소개되고 입소문이 나자 손님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멤버들 반응에 빵 터지기도 했어요. 첫 손님의 등장에 멤버방에 그 소식을 날리니 "어떻게 온 건데. 왜 왔어" (왜 왔어라니 ㅋㅋㅋ), 손님들이 몰릴 땐 "왜 밥집도 아니고 술집에 줄을 서는 거야." 등 생생한 반응들이 공감 가더라고요.





생소한 운영 시스템과 처음 해보는 창업이면서도 혼자서 했더라면 더 진 빠지고 힘들었을법한 여정들도 (물론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함께였기에 이겨낼 수 있었던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열 명의 사장이 가게에서 벌어지는 어떤 이슈에서든 한목소리로 의견 일치가 되는 건 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죠. 사소한 것에도 지지고 볶는 일이 벌어지곤 하지만, 이들은 협동과 공유라는 든든한 기둥을 버팀목 삼아 해결해나가고 있습니다.


매달 월급의 10퍼센트를 낸다는 건 요즘 세상에 현실적으로 큰돈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지갑을 열게 한 꿈과 의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동업을 하든 투자를 받든 다양한 창업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지요. <십분의 일을 냅니다>는 청년 아로파 공동체의 창업이 기존의 것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십분의일 인스타그램에는 셀프 인테리어부터 현시점까지 생생하게 창업 여정을 피드로 만날 수 있어요. 빈티지한 인테리어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와인을 모르는 일반인들도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와인바 십분의 일. 책에서 어찌나 잘 묘사했는지, 읽으며 상상한 것과 비슷한 분위기더라고요.


그나저나 저자는 퇴사 후 카페에서 글을 쓰며 드라마 작가로서의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청년 아로파의 첫 창업이 잘 된 데다가 이후 계속 확장 중이니 어쩌나요. 맛깔스러운 글맛이 참 좋아서 이현우 저자가 쓴 드라마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드라마 작가의 꿈도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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