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영국 작가 T. M. 로건은 스릴러 소설 작가로 입지를 탄탄히 다지고 있습니다. 30만 부 이상 판매된 데뷔작 <리얼 라이즈>에서는 거짓말의 끝을 향해 달리는 심리 스릴러를 선보였다면, <29초>에서는 인생의 걸림돌을 헤쳐나가는 사회적 약자의 긴장감 가득한 복수극을 보여줍니다. 아직 국내 발간되지 않은 최신작 <홀리데이>도 호평을 받았다 하니 영국 스릴러의 맛을 기대해도 좋을 듯합니다.

 

<29초>는 이 소설의 결정적 순간에 사용된 시간을 의미합니다. 단 29초의 통화. 돌이킬 수 없고, 모든 것을 뒤바꾸는 29초.

 

조건은 세 가지였다. 72시간 안에 이름 하나를 말해야 한다. 거절하면, 제안은 사라질 것이다. 영원히. 받아들이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선택을 번복할 수도 없다. - 29초

 

 

<29초>는 초반부터 악마와의 거래와 같은 조건을 내세우며 무언가에 대한 복수극이라는 걸 오픈합니다.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인 고전 소설 <포스터스 박사>에서처럼 정말 악마가 등장하는 초자연적 스릴러는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어떻게라는 궁금증을 안긴 긴장감 넘치는 도입부는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2년간 악질 상사 러브록 교수로부터 성희롱을 당한 대학교 계약직 시간 강사 세라. 방송에도 출연하고 학자로서도 명성 있는 유명 교수라는 타이틀 덕분에 모두들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 일개 계약직 강사 신분으로는 방탄 교수가 넘사벽 그 자체입니다.

 

힘을 가진 교수가 세라에게 요구하는 것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와 맞닿아있습니다. '너도 원하는 거 알아.', '난 자네가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비싸게 굴 때 좋더라', '나 때문에 향수를 뿌리는 건가' 등등 욕지기가 나올만한 대사에 읽는 독자마저도 어이없게 만듭니다.

 

승진 심사를 앞둔 시점. 승진을 미끼로 헌신을 보여보라는 교수의 끈질긴 성희롱 앞에서 아슬아슬 줄타기 신세가 된 세라. 분노, 수치심과 함께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입니다. 희생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솟구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질책하며 자괴감에 빠집니다.

 

그러다 우연히 다른 사건에 휘말린 세라에게 의문의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한 사람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내 인생에서 사라져야 마땅한 사람이라니. 누구에게나 이름 하나쯤은 있을 거라며 그야말로 악마의 달콤한 제안입니다.

 

내게 이름 하나를 주십시오. 한 사람의 이름을. 내가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해주지. - 29초

 

 

72시간 내 선택을 해야 하는 세라.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충분히 오랫동안 참고 버틴 세월은 아무런 해결책 없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현실만 남았던 세라에게 이 제안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불안, 공포, 죄책감 등이 혼재한 상황이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결국 세라는 통화를 합니다. 29초 만에 한 사람의 인생이 뒤바뀝니다. 세라가 말한 이름의 주인공은 다들 짐작하겠지만 이 즈음이 겨우 소설의 중반에 해당하는 스토리이니 이후 향방은 비밀스럽게 남겨두겠습니다.

 

러브록 교수는 여자의 '거절' 표현이 일부러 남자를 애태운다고 '착각'하는 남자의 전형입니다. 분노와 묵인 사이의 경계를 오가는 세라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커리어를 두고 협박하는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교묘하게 일을 빼앗기고, 승진 기회가 묵살되고. 직장 내 성희롱은 힘희롱과 같음을 토로한 이은의 변호사의 책 <예민해도 괜찮아>의 사례를 떠올리게 합니다.

 

약간의 구멍도 발견하고, 소설 초반에 드러낸 작가의 의중이 교묘하게 뒤틀리는 수법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직장 내 힘희롱으로 변질된 현실 속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여성의 마음을 보여준 소설이란 점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소설이기도 하다는 게 씁쓸합니다.

 

이성과 격정 사이의 선택. 논리와 감정 사이의 선택. 그런 선택이 공정한 싸움이었던 적이 있긴 할까? - 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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