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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황가한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2017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수상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See Under : LOVE>. 홀로코스트 문학의 새로운 고전으로 평을 받은 소설입니다. 이스라엘 건국 후 태어난 작가의 객관적이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한 시선은 기존의 홀로코스트 증언에 의존한 문학과는 또 다른 울림을 줍니다.

1장 모미크 편은 화자인 모미크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당시 이스라엘 건국 후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이의 간극, '저 멀리'에서 겪은 공포를 침묵과 한숨으로 묵히던 시절입니다.
수용소에서 죽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안셸 할아버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려 애썼던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아홉 살 모미크는 '역사에서 이름을 지워 버려야 마땅한' '나치 짐승'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저 멀리'의 사라진 땅을 퍼즐 맞추듯 재구성합니다.
"죽음의 열차가 뭐예요?", "그들은 왜 어린아이들을 죽인 거죠?"라는 질문을 하지만 답은 들을 수 없습니다. 한밤중의 악몽으로 밤잠 못 이루는 아빠, '저 멀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모두가 그에 대해 얘기하지 않으려 애쓰는 당시 분위기 속에서 모미크는 수수께끼를 풀듯 나름의 가설을 세웁니다.
'나치 짐승'을 키운답시고 동물들을 지하실로 데려와 가둔 채 '짐승'이 나오길 기다리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벌이고, '저 멀리'는 분명 아름다운 땅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점점 알게 되는 모미크는 실존 인물인 유대계 폴란드인 작가 브루노 슐스에게 푹 빠집니다. 『모래시계 요양원』, 『계피색 가게들』 두 권의 저서를 남긴 브루노 슐스는 나치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작가 브루노가 살해당한 이유를 알게 된 후 모미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본 후에도 어떻게 삶이 계속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빠집니다.
살해당하지 않고 탈출했다고 믿으며, 미완성 원고인채 사라진 『메시아』를 재현하는 모미크. 살아보지 않은 '저 멀리'에서의 삶을 알기 전까지는 인생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모미크로서는 이제 브루노를 열쇠로 활용합니다.
브루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브루노와 모미크의 대화로 이루어진 2장 브루노 편. 환상과 은유로 이뤄진 방대한 상상력을 펼친 글은 과대망상증 환자의 글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파트이기도 했습니다.

3장 바세르만 편은 어린 시절 나타난 안셸 할아버지의 '하얀 방'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안셸 할아버지와 수용소 소장과의 대화 속에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나치 입장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셰에라자드처럼 수용소 소장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안셸 바세르만. 소장이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의 작가인 바세르만은 동화의 후속편을 지어 들려주게 됩니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위해 이야기 쓰는 작가가 된 셈이죠. 새로운 이야기에 처음 등장시킨 카지크라는 인물은 작가와 소장의 미묘한 심리전에 활용됩니다.

나치 집단 학살 수용소에 머물며 나이겔 소장에게 들려준 이야기의 주인공 카지크.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마지막 4장에서는 카지크의 전기를 다룹니다.
24시간 만에 사람의 일평생을 겪고 죽는 아이 카지크. 카지크는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는 동안 전쟁에 대해 전혀 몰랐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인물입니다.

4장 '카지크의 삶에 관한 완전한 백과사전'은 소설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에서 언급된 이야기들과 부차적인 설명이 항목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700페이지 넘는 묵직한 분량의 소설 대부분이 은유가 많아 쉽게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는데, 소설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홀로코스트와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들이 단번에 정리된 느낌입니다.
악몽 속에서 홀로코스트를 추측하거나 재현하며 고통으로 신음하는 삶을 산 모미크. 가정을 꾸려 그의 아이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물었을 때 정작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는 심정을 밝힙니다. 침묵과 한숨으로 점철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삶. 2차 세계대전은 육 년 만에 끝났지만, 그들의 전쟁은 몇십 년째 진행 중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가 빌었던 소원은 딱 한 가지였습니다. 카지크가 전쟁을 모르는 채로 생을 마치게 해달라는 거였죠. (중략) 우리가 바란 건 그렇게 사소한 거였답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는 동안 전쟁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요. - 책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