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도서관 일을 마치고 K선배를 불러냈다. 선배는 내가 학교 휴학하기 전에 학교를 전경으로 (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고 했다. 배경이든 전경이든 그저 좋았다. 선배는 사진 동아리에서 수년을 활동했기 때문에 실력을 의심치 않았으므로 나야 룰루랄라 신이 났던 거다. 먼저 인문대 1호관 건물 앞에 서서 한 컷, 쪼그리고 앉아서 또 한 컷, 그리고 주로 미대쪽 조각들의 포즈에 맞춰 오바 액션을 취했다.

가령 턱을 괴고 있는 여인네의 옆에서는 똑같이 턱을 괴고 누워있는 꼿꼿하게 서 있는 조각상 옆에서는 차렷 자세로 서있는 그런 아조, 평범하리만큼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 공을 쥔 것처럼 오무리고 있는 큰 손가락 모양의 조각상에 올라가 앉거나 누드로 누워있는 여인네의 등허리에 앉아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그 예술품들을 욕되게 한 것 같아 그 작품들의 작가와 작품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힐끔거려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카메라와 선배에게 집중했다. 부쩍 차가워진 날씨에 볼이 시리고 폼 잡고 있는 내 꼴이 하도 웃겨서 정신없이 웃었더니 빈속만 헛헛해졌지만.

그렇게 오후 한나절을 보내고 종종거리며 걸어서 학교 앞에서 밥을 먹고, 곧장 선배 동방에 갔다. 피곤하다고 내일 인화하자고 그러는데도 오늘 다 해치우자고 우기고 우겨서. 암실에서 필름을 빼내서 통에 감고 그 통에 용액들을 넣어야했는데 냉장고에 넣어둔 용액이 얼어있어서 일이 번거로웠다. 버너에 물을 데워서 고무통에 넣고 녹이고 또 물을 끓이고 고무통에 붓고. 한참 지나서 인화액 정지액 정착액 온도를 맞추고 필름을 풀어놓은 통에 그것들을 각각 시간에 맞춰 넣고 흔들고 해서 헹궈냈다. 다시 필름을 빼내서 건조대에 걸어놓고 말리는 동안, 선배와 나는 히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선배에게 여기 동아리 사람들은 좋으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한다. 한참을 머뭇대다가 나는, 예전에 같이 활동한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상처주고 그 상처를 고스란히 되받고, 그렇게 그 무거운 짐을 떠안느라 힘들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덤덤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도 선배 같은 사람들이 많은 데를 들어가서 대학생활을 즐겁고 신나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며 장난처럼 말했다. 평소엔 순하다가도 싸울 때만은 열과 성을 다해서 집중하는 내가, 실은 나 자신도 질린다고도, 나 자신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은 오죽했겠느냐고도. 이렇게 풀어놓으면서 어쩌면 난 선배에게 이해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선배는 살짝 웃으면서 지금 내 모습이 마치 떠나는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단다. 예전 일 회상하기, 짜증이 날 만큼 불쾌했던 그런 일들을 무조건 자기 잘못으로 돌려놓고 반성하기, 그리고 그 상대들을 아량 넓은 사람처럼 이해하고 용서하기 등등.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난 아무래도 내가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싶어 겁이 난다고 말한다.

잠시 침묵. 선배는 그렇게 나아갈 길을 머뭇대면서 자꾸 사람들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한다는 자체가 중요한 거라고 나를 다독인다. 내가 잘하던 말을 되뇌어준다.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는 거라고. 끝이라고 생각해도 그게 끝은 아닐 수도 있다고. 나를 다독여주는 선배에게 오늘 너무 진지한 척했다고 아직 필름 다 안 말랐냐고 얼른 완성된 게 보고 싶다고 선배를 재촉한다.

일일이 설명해줬지만 하루가 지나서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 어떤 기계로 몇초간 빛을 쏘이고, 빛을 쏘인 용지에 또 다시 각각의 용액에다 담갔다가 마지막으로 물에다 담갔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사정없이 둬서 빨랫줄에 사진들을 건다. 물에 오래 헹궈내야 사진이 오래간다고 했다.

용액에 담갔을 때 서서히 형체가 드러나는 모습이 신기했다. 초점이 잘 맞은 그 사진이, 용액 속에서 선명해질수록 가슴이 벅찼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그 일이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일이 사람을 이렇게 기쁘게 만드는 일인줄 몰랐던 거다. 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 그 부분의 일만을 볼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사람들을 더없이 각박하고 삭막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사람의 손이 많이 가야 완성되는 사진이, 이 흑백사진이 왜 따뜻해 보이는지, 인물이 형편없이(?) 생겨도 사진을 찍는 사람이 그 정성과 사랑을 그 인물에 쏟아 부으면 사진이 하나의 작품처럼 나오는지도 알 것 같았다. 무뚝뚝해서 별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많은 것을 알려주고 느끼게 해준 K선배에게 앞으로 오백년 동안 축복이 있길.

오늘 도서관일 마치자마자 빨랫줄에 걸려있는 사진을 걷으러 갈 거다. 아, 즐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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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1 2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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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그림자 2005-02-0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잘 안 읽히고요, 글도 잘 안 써져요. 자주 찾아뵙는 학과 선생님은 제가 들떠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렇진 않고요. 불안한 게 더 많아요. 되도록이면 가까운 데라도 많이 나다닐 생각하느라 통 글에 집중이 안 되나봐요. 요샌 그냥 많이 먹고 많이 웃고 많이 울면서 시간 보내요. 이걸 준비라고 하면 웃으실텐데... ^^ 그 날짜까지는 시간이 좀 여유로워서인지 구체적인 준비를 해야겠다는 실감은 안 나요. 한달 전부터는 차차 시작해야할 것 같아요.

날이 살벌하게 추워요. 일 때문에 날마다 밖에 나가야하는 게 곤욕이에요. 바깥에서 조금만 걸어도 어깨가 묵직해져요. 추위에 어깨가 저절로 움추러져서요. 추운 겨울을 좋아하긴 한데 이렇게 추워서야... 이럴 땐 엄마 말씀이 떠올라요. 없는 사람들은 겨울이 살기 힘들다던데, 하시던... 님은 잘 지내시나요?

2005-05-06 0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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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0 2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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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5 00: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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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3 2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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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그림자 2005-07-3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전에 집을 옮겼답니다. 주소는 말이지요, 2 Coronado pl Russely Christchurch New Zealand랍니다.